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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06 12:46
* [조선기독교도연맹]은 교회인가?
 글쓴이 : admin
조회 : 4,246  
예장합동 동평양노회 북한교회재건위원회 발행 “북한교회에 대한 연구” 제5집 원고 1998. 12. 8. 김 중 석 목사(북한교회재건위원회실무책임자 한국통일신문발행인
 
통일을준비하는모임실무대표 사랑교회담임 총신대신학대학원강사)
 
 

[조선기독교도연맹]은 교회인가?
 
 

1998년 2월 김대중대통령 정부가 들어섰다. 김대중정부는 대북정책에 있어서 이른바 [햇볕론]을 내걸고 대북 포용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계속 남한정부를 인정치 아니하므로 [정경분리원칙]을 내걸고 북한을 경제적으로 계속 지원하고 있다. 햇볕론과 정경분리를 근간으로하는 현정부의 대북정책에 따라 1998년은 가히 전에없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고[입북러시의 해]가 되었다. 금강산 관광객을 제외하고도 남한사람 약 6천여명이 금년에 북한을 방문하였는데 이 숫자는 지난 50년간 북한을 방문한 숫자보다도 많다. 경제인이 압도적으로 많고 학자 예술인 그리고 종교인등이었는데 이중에 개신교 관계자는 19명이었다. 개신교 대부분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청장을 받아가지고 갔다. 그리고 한결같이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위상을 높여주어야 한다, 연맹에 힘을 실어주도록 하자”고 부르짖었다. 여기에는 가장 보수적임을 자랑하는 예장합동총회도 속해있다. 과연 조선기독교도연맹과 상종하는 것이 합당한가? 우리가 연맹을 창구로 이용해주면 북한에서 기독교 위상이 높아지는가? 과연 연맹을 통해서 간 분들이 연맹이 무슨 단체였으며 지금 무슨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갔는가? 필자는 조선기독교도연맹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먼저 정리하자고 여러번 기회있을 때마다 제의했다. 한국교회의 보수측만이 아니라 진보측도 함께 모여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과연 어떤 단체인지, 그 단체와 한국교회가 협력해도 좋을지를 대대적으로 토론을 하여 한국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자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정리하지 아니하고 나아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한국교회가 대북접촉을 함에 있어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나아갈 때 남한교회는 분렬되고 북한에 끌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상하게도 이러한 필자의 제의를 외면해 왔다. 보수쪽은 연맹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의가 없어서인지, 대세에 이끌려서인지 엉거주춤 연맹을 창구로하는 북한행에 끼어들었다. 진보쪽에서는 이미 십여년 전부터 연맹과 관계를 맺어왔기에 이제와서 연맹에 대하여 파헤치는 것을 내심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연맹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서 한국교회의 대북관계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연맹에 대하여 공론화하는 것 자체를 한국교회에 폭발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는 [아킬레스건]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연맹의 진실을 한국교회는 알 책임이 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연맹의 실체를 바로알고 교회를 지도해야할 의무가 있다. 연맹을 바로 알면 한국교회의 인식이 크게 바뀔 것이고 한국교회의 대북정책에도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연맹에 대하여 잘 모르고, 또는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연맹을 상대역으로 상정해 놓고 진행해 오고, 가시적인 성과에 치우쳐 유도된 감을 지울수 없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은 과연 어떤 단체인가? 연맹을 우리가 상대역으로 삼아도 좋을 것인가? 진지하게 검토해 본다.

 

1945년8월15일 일왕의 항복방송을 듣고 만세소리와 찬송소리에 뒤덥혀있던 성도들 중에서 누군가 “형무소로 가자”고 하자 마치 잊고있기라도 한것처럼 “빨리갑시다”하면서 평양형무소로 달려가 형무소 문을 부수고 38명의 산 순교자를 업고 나왔다. 긴 옥고를 치르니라 엉망이 된 몸들을 평양고등성경학교에 모셔놓고 부인회의 도움으로 간병을 하였다. 한 자나 자란 수염을 깍고 닭을 잡아 보신시키며 떡을 하여 잔치를 하였다. 차츰 원기를 되찾은 목사님들의 간증을 들으며 그 자리서 부흥회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신자들 앞에서 고문당한 흉한 흉터를 보이며 간증을 하실 때에는 모두들 눈물로 감격하며 은혜를 받았다. 성회는 불이 붙고 교회는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골방에서 산에서 기도하던 신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옥성도들의 소식이 전국에 알려져 수많은 사람이 돌아오는 가운데 각 노회가 조직되고 청년면려회가 서기 시작하였다(김두영목사 ‘몰래익은 포도송이’ 145P참조). 이와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의 준동도 더해져 갔는데 12월3일 제47회 경남노회는 공산주의자의 창궐로 기독교와 전면 대결하여 충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한국기독교사연대표454P참조). 이러한 신앙부흥운동과 더불어 9월18에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정당인 기독교 사회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0월1일에는 평양신학교가 재개교되었다.> 11월14일 평북 월곡동교회에서 개최된 교역자 퇴수회에서는 교회재건 5개조가 발표되었다. 이때는 이미 김일성 일당이 평양에 들어와 조만식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하면서 쏘련군정의 힘을 업고 속속 권력을 장악해 가고 있을 때였다. 이에 의분을 느낀 기독학생들이 궐기하여 공산당 관서를 습격하는 일이 신의주에서 11월23일에 일어났는데 이를 <신의주 학생의거사건>이라 하고 오늘날 한국의 <학생의 날>은 이날을 택한 것이다. 12월에는 북한 5도노회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북조선 기독교청년면려회도 조직되었다. 크리스마스 때 평양 마포사열 기념관에 기독교 종합사무소가 개설되었다. 공산당이 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으며 대결과 핍박은 닥아오고 있었다. 본격적인 대결은 이듬해 3.1절행사와 더불어 일어났다. 이듬해 1946년 2월23일 평양 서문밖교회당에서 첫 북조선기독교청년면려회 청년대회가 나흘간 개최되었다. 공산당의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청년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180여 교회가 대거참여했다. 집회가 끝난 다음날 면려회 모든 임원들이 검속되어 조사도 받지 않은채 며칠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동시에 평양교회 지도자 70여명도 검속되었다.이것은 며칠 후에 장대현교회당에서 있을 3.1절 기념행사를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도자가 없어도 3.1절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무장한 70명이 교회에 들이닥쳐 집회 중단을 외쳤다. 중단치 않고 강행하자 그들은 강단으로 올라가 목사 6명과 나머지 지도자들을 끌어내렸다.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끌려가는 분들을 바라보던 회원들이 “우리도 다 같이 갑시다”하며 함께 따라 나섰다. 물밀 듯이 교회문을 빠져나와 무장한 서원들을 겹겹이 둘러싸고 가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십자기를 앞에서 높이 들고 갔고, 길을 메운 청년들은 찬송을 부르며 둘러싸며 갔다. “야, 십자기 내려! 안내리면 쏜다”엄포와 고함이 있어으나 눈하나 까닥하지 않고 전진하였다. 그러자 소련군이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청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포가 발사되고 마이크로 돌아갈 것을 계속 강요하였으나 꼼짝도 않던 청년들은 검속된 임원 15명을 전원 석방시키기 전에는 가지 않는다고 요구하였다. 어쩔 수 없던 소련군들은 그 요구를 들어 주겼다고 하고 모드를 해산시켰고 3일 후에 석방되었다(기독교사연대표456P, 김두영 上揭書148P).

 

1946년4월7일 횡해도 재령 서부교회에서 황해 기독청년면려회 청년대회가 2000여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평양에서는 4월6일 부활주일부터 오순절까지 50일간 연속 부흥사경회가 개최되었다. 64개 교회가 8교회씩 8조를 이루어 돌아가면서 한 주간씩 집회를 하는데 노방전도를 겸하여 진행하엿다. 두주간을 끝마친 4월20일 오후, 아날도 예외없이 밴드부를 이끌고 청년면련회가 시내 전도를 실시할 때였다. 시내 사거리에서 보통문으로 가는 약 1킬로미터 거리에 행진하면서 인파가 너무 많아 그 앞의 창광산 파출소까지 인파 대열이 길게 되었다. 5000여명의 인파가 ‘십자가 군병들아’하며 시가행진하는데 인파가 자꾸 늘어났다. 이런 현상에 교회측도 놀랐고 보안 당국이 놀라서 경찰대를 동원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주위를 돌았다. 면련회회장이 달구지 바취에서 올라가 설교를 하고 내려오니 4명의 파출서원이 따발총을 앞과 뒤에 대고 손들고 순순히 따라가자고 하였다.‘이 많은 군중 앞에서 지도자를 구속해 가면 일이 어렵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까?“해도 가자고 했다. 회장은 ’그럼 이시간부터 군중들은 당신들이 책임져야 합니다‘하고는 큰소리로 ”이 시간부터 군중의 책임문제는 파출소에서 집니다“해놓고는 따라갔다. 그 때였다. 군중들이 갑자기 ”와-“하면서 일제히 파출소로 몰려가니 목조와 함석으로 지운 파출소 건물이 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군중들에 의하여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태가 급박하게되자 서원들은 총을 꺼내들고 군중을 향해 쏘려고 했다. 회장은 ”안돼“고함을 지르며 총부리를 낚아챘다. 서원들은 본서를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책망만 내렸다. ”빨리 그들을 보내!“ 라는 명령으로 모두 돌려보내졌다. 회장은 ”수리비는 우리가 드릴테 얼마인지 계산하여 연락하시오“하고 교회로 돌아와 기적이라고 해기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후에도 5.1절,5.5어린이날, 5.19시위,9.30시위 등으로 기독교가 공산당에 비협력하는 반동세력으로 판단이 되었고 복한 각지에서 기독교에 대한 공산세력의 박해와 참사가 무수히 일어나게 되었다. 가장 큰 대결은 이해 11월3일 주일을 북한이 선거일로 설정함으로서 촉발되었다. 10월20일 북조선 5도노회연합회는 11월3일주일선거 반대 5개조를 발표하면서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바로 이때 소위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명의로된 주일선거 지지성명 4개조가 발표되었다. 이것을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시작으로 본다.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량욱목사가 김일성의 공산당을 돕고 기독교를 제압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인 것인데 이 때로부터 [연맹]은 북한교회를 말살하는데 최선봉에 서서 갖은 망령된 일을 다 자행하여 악명을 날리게 된다. 11월3일 주일선거에서 북한의 거의 전체 교회는 이에 불복하고 적극 반대투쟁하여 큰 시련을 겪으며 많은 지도자들이 검속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연맹]은 주일선거를 선동하는 활동을 하였다. 11월18일에는 평양에서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하려는 조직이 누설되어 김화식목사등 40여명과 기독교지도자급들이 검속되었는데 이들을 거의 옥사하고 말았다. 그후 11개월 정도는 기독교 박해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비사가 있었다. 기독교에 대하여 반동으로 규정하고 가해지는 박해가 각처에서 극심해져 도저히 묵과할수 없게끔 되자 북조선청년면려회장이 소련군정장관에게 열아홉가지 조목으로 진정서를 냈다. 네 번이나 진정을 냈으나 무응답이었다. 직접 군정장관실로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맘먹은 회장은 군정장관에서 보니까 자기가 보낸 진정서가 그대로 쌓여만 있음을 발견했다. 장관을 만나자 ”처음 진정서를 낸지 45일이 지났습니다. 소식이 없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고 했더니 ”나는 조선어를 잘 모르오. 1주일만 더 기다리시오“하는 것이었다. ”장관님, 진정이란 절박해서 하는 것인데 장관께서 45일이 지나도록 손놓고 계신다면 그동안 사람은 다 죽으란 말입니까? 당신 같은 야만인들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오. 취소하겠으니 진정서를 내 놓으시오“했다. 장관이 ”그것은 안되오“하자 화가난 회장은 테이블 위에 있는 초자판을 손바닥으로 당기어 장관의 코를 향해 힘껏 던졌다. 장관의 코를 비껴나간 초자판은 유단 바닥 위에 딩굴었다. 회장은 진정서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넣고 그곳을 나오려고 했다. ”소련 군정하에서 교회는 깨끗하게 박해를 받겠소. 나도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하며 문을 닫는 순간, ”잠간만! 미안하오.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 번만 더 기다리시고 그 서류를 이리 주시오. 내 꼭 1주일내에 답해 두리리다“ 그렇게 해서 집에 돌아와 ”거 참 이상하다. 왜 총으로 쏘지않고 친절히 보냈을까?“의심하는 가운데 1주일이 지나자소련군 대위가 찾아와 따라가 보니 군정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정을 낸 회장을 원고로 하고 평안남도 내각 경찰서를 대표하여 대동경찰서장이 피고가 되고 군정사령부 사령관이 재판관이 되어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1.시위 행렬에 참가.불참가는 인민의 자유다. 시위 행렬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검속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자를 직위해제하라. 2. 표어나 구호는 일정한 게시판에 부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까지 부친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모두 철거시켜라. 3. 개인의 소유권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를 빌어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4. 교회에서 일요일 부역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검속하는 것은 부당하니 즉시 석방하라.고 경찰서장에게 판시했다. 또한 원고에게는 ”교회에서 표어나 구호를 무리로 뜯어서 말썽을 빚은 것은 부당하다. 앞으로 보안원이나 사회 단체에서 불법 행위가 있을 때는 직접 처리하지 말고 보안서에 가서 사유를 설명하고 선처를 요구하여도 반응이 없을 때에는 소련군 사령부에 와서 진정하라.이상!“하였다. 회장은 ”원고로서 묻습니다. 지금의 내용을 판결로 받으라는 것입니까?“”그렇소“”그러면 이 판결 내용을 인쇄하여 교회에 발소앟여도 되겠습니까?“”좋소“이런 과정을 거쳐 잠시나마 북한의 뜸해지기는 했다.

그러다 1948년 1월에 들어서는 [연맹]을 내세워 공산당은 기독교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는데 모든 교역자는 물론 일반 신자들까지도 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거부하는 자는 교역자 시무를 할수 없게 만들었고 신학생은 공부를 못하게하고 신자는 교회생활을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49년2월에는 [연맹]이 총회를 결성하고 이때부터 [연맹총회]가 노회와 교회를 직접 관할하게 되어져갔다. 당국에 종교단체로서는 [연맹]이 등록되었을 뿐이니 그밖의 단체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기독교 박멸이 완성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사실상 48년 부활절 이후에는 북한에서 공식적인 집회가 거의 불가능하게 이미 되어졌다. 49년 부터는 북한이 전쟁을 준비하는 단계로서 우선 기독교를 압살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연맹총회]를 결성하여 아예 기독교를 공산당이 접수하는 것이었다. 49년 말에는 더욱 초조해진 공산당은 말안듣는 기독교 지도자를 쥐도새도 모르게 죽이기 시작했다. 평양 경창리교회를 시무하던 강문구목사가 피납순교했고 감리교 성화신학교장 배덕영목사가 피납순교했고 평양신학교교수 김태복목사도 피납순교되었다. 재건파지도자 이창환전도사도 피납순교했다.
 
이상으로 6.25이전 [연맹]이 생긴 내력과 역할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였는데 독자들의 이해를 편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논문식으로 기술하지 아니하고 이야기식으로 기술하였다. 연맹의 한 일은 북한교회사,평양노회사,황해노회사,평북노회사,진남포백년사,풍산읍교회백년사,등을 보면 좀더 자세히 알수 있고 아직 살아계신 교회 원로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6.25 이후의 연맹에 대하여는 졸저 [북한교회재건론]가운데 [조선기독교도연맹]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만 간단히 줄여 말한다면, 전쟁후 북한은 선언하기를 “지상에서 종교가 없는 유일한 지상낙원”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즉 북한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가 철저히 말살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연맹]도 소용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용도폐기>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72년 7.4공동성명이 나오면서 다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나타났다. 이 때부터 북한은 종교를 정치선전에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해외에서 개최되는 종교회의석상에 열심히 연맹대표를 파송하여 정치선전을 북한에 유리하게 이끌도록 이용하기 시작했다. 연맹은 로동당 산하 위성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현 위원장은 대남비서인 김용순) 산하 기구이다.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선전선동하는 일에 최일선에 배치되어있는 전위부대이다. 그러기에 한국을 비방하고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인을 비방하는데 가장 강도높은 용어를 사용하여 비방하는 곳이 연맹이다. 특히 북한교회재건을 가장 싫어한다. 북한교회재건운동은 연맹이 하고져하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하는 운동으로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역사와 현실을 모르고 북한을 방문한 다음 북한교회재건운동에 은근히 비판적인 말을 흘리는 기독교 인사들이 있으니 북한 연맹인사들도 속으로 웃을 일이다.
 
 

결론적으로 <조선기독교도연맹>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를 박멸하는 기관으로 작용했었고, 지금은 교회를 막고 공산화를 선두에 서서 부추기는 기관이다. 지금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나 기독교인이요“하고 나오는 사람은 분명히 가짜이다. 진짜 기독교인은 다 숨어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도 주일날 문을 여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오직 외국에서 손님이 오는 날에만 예배를 형식적으로 모이는데 그들의 용어로 <예배를 조직한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예배를 자발적으로 모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선전 목적을 위하여 신앙을 가장하여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연맹의 지금의 목적은 세가지이다. 첫째는: 남한교회나 북미교회의 분렬을 조장하는 것. 둘째는: 친북세력을 구축하여 가능하면 제2의 조총련을 만드는데 기여(방조)하는 것. 셋째는: 북한을 위하여 모금하는 것이다. 이중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모금}이다. 그러므로 연맹의 인사를 만난다고 하면 교회로서 대할 것이 아니라 정부의 한 기구로서 대하면 된다. 교회로 인정하면 지하의 성도들이 통곡할 것이며 지금도 살아있는 산 순교자들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될 것이다. 교회로 인정하는 것은 제2의 신사참배와 같은 오점을 한국교회 역사에 남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체제상 연맹은 힘이없는 최하위 부서에 불과하다. 아무런 재량권도 없다. 상대하려면 가능한 높은 부서를 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만약 조선기독교도연맹 강영섭 위원장을 만나서 ’목사‘라고 하지 말고 ’위원장‘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리고 ”은혜받았습니다“같은 아첨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의 그날, 연맹은 부끄러움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이들을 상대로 했던 남한의 기독교 인사들도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교회의 대북관계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연맹을 교회로 인정하는 실수만은 범하지 말기를 충심으로 바라며 권면하는 바이다.

 

동평양노회는 총회 중에서도 가장 큰 노회에 속하고 이북노회 중에서도 대표적인 노회이다. 이런 동평양노회 안에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특별위원회로 조직되어 활동하는 것은 당연하고 귀한 일이다. 노회 안에 18개 북한교회재건담당교회들이 있다. 이들 교회들과 연계하여서 전 노회원들과 소속 교회들의 통일의식과 교회재건의식을 고취하고 구체적인 준비를 해 나간다면, 다른 노회들에게 본이되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은 갑자기 올 것이다. 준비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 1999년 한국교회가 대북관계에 있어서 <거품>을 걷어내고 진실을 추구하며,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고 대북정책을 세우자. 노희 북한교회재건위원회의 큰 발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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