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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6-16 11:17
1866년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웨일즈 출신 토마스 선교사
 글쓴이 : admin
조회 : 7,714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 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 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이다.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 중부의 작은 마을 롸야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토마스 선교사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들의 기도 속에서 사무엘처럼 자랐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웨일즈에서 잘 알려진 목회자였으며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토마스가 3살 되는 해 런던 선교회로 보내는 선교사 지원서에 “저의 부모님은 제가 선교사가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라고 썼다. 토마스는 9살 때 아버지의 새 부임지인 하노버로 이사를 했으며 클란도버리 칼리지(college)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는 총명했고 공부를 유달리 잘해서 14살 때 옥스퍼드대의 지저스 칼리지(college)에 장학생으로 입학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입학하지 않고 외과의사가 되기 위해 2년간 닥터 워터만 밑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사역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 의사 공부를 포기하고 잉글랜드의 ‘운들’ 초등학교 교사로 간다.

거기에서 평생의 반려자 캐롤라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운들의 영주이고 갑부였던 존 고드프리의 외동딸로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토마스는 1년간 교사로 활동하다가 웨일즈로 돌아 온다. 그는 중국에서 의사로 사역하다가 잠시 귀국한 닥터 록 하드의 설교에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한다. “선교사의 자질은 첫째,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 둘째, 건강한 체력을 가진 사람 셋째, 언어를 배우는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희망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부인(否認)하는 정신으로 사역하고 싶습니다. 지난 3년 전에 헌신한 이후 신중하고 진지하게 기도하였으며 이방인의 개종을 통해 우상숭배가 몰락하는 선교사역을 진지하게 갈망하는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던 1863년 결혼식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받고 7월에 그레이브샌드 항을 떠나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사역하던 중에 아내 캐롤라인이 유산으로 인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토마스는 비통한 마음이 들었으나 자세를 가다듬고 사역에 전념하다가 1864년 12월에 중국 체푸로 오게 된다. 그곳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된다. “저는 조선이 현재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보다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조선은 큰 역량을 지닌 나라입니다. 조선인들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빈틈이 없으며 영리하고 단호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1865년 그는 체푸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중국인 우문태가 선장으로 있는 배를 타고 한국 서해안에 들어와서 2개월 반 동안 복음을 전했으며 이 여행은 4개월 간 계속되었다. “두만강을 지나는 많은 조선인 가정들이 러시아 땅에 조용히 정착했습니다. 러시아 군인은 많으나 상인은 적고 선교사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슬픕니다.”(선교회에 보낸 편지 1866.1.12)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 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 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됐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이라는 자였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 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 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토머스의 목을 친 병사 박춘권의 말이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토머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성경을 뿌리며 전도했다. 이때 그에게서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마펫 선교사를 찾아왔다는 일화는 그의 최후를 암시한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순교이후 16년이 지나면서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 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토머스의 순교를 기려 1926년 순교 60년 기념회를 조직, 1927년 5월8일 그의 순교지에서 1천여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으며 1928년에는 오문환목사의 집필로 전기가 나왔고 1933년 9월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 http://www.sarangchurch.co.kr/bbs/view.php?id=freeboard&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7&PHPSESSID=6855e4b84462278581a22bf8787241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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