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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5-27 16:05
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 (9)
 글쓴이 : admin
조회 : 3,784  
   http://www.ilovejesu.net/china/wchina09.htm [786]
우리는 방주 짓는 일과 자기 집 짓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자기 집 짓는 일을 가지면서 다른 것을 더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 집과 방주 중의 하나를 버리는 선택이다. 신앙은 관념(지식적 믿음)이 아니라 삶이다. 방주의 필요성이나 방주의 설계에 대하여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삶에서 방주를 지어 가는 과정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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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지식이 아니라고 하시는 주님

중국교회 생활은 나를 성경가운데로 끌고 들어오게 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성경을 읽었다. 무엇보다 집회가운데서 열려지는 말씀들은 내게 큰 양식이 되었다. 몇 년을 두고 먹어도 충분할 양식을 쌓아 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을 증거할 자신이 생겼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뿌듯함과 기쁨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간 내 신앙생활은 엉망 그 자체였다. 구원만 받았을 뿐이지 생활이 없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생활집회라는 이름을 건 곳에 가 보아도 오직 돈 얘기였다. 하나님 자리에 돈이 앉아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우리는 목말랐고 주렸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었다.

 


중국교회에서 난 수가의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다섯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같았다. 마을로 들어가 오늘 내가 그 선지자를 만났다고 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말씀을 보고 먹는데 정신이 없었다. 집에 돌아온 탕자와 같이 살진 송아지 고기를 먹는데 정신이 없었다. 조금씩 알 것도 같았고 아는 체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측은했던지 노 형제님은 “형제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형제님과 함께 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노아 형제님을 한번 만나 보시지요”라고 하신다. 나는 노아 형제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형제님은 대답이 없이 웃기만 하셨다.

 


나는 다른 형제분들에게 노아 형제가 어떤 분이시냐고 물었지만 모두 웃기만 했다. 그 때야 비로소 노아 형제가 창세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나오는 노아라는 것을 알고 겸언쩍어 했다.

 


신앙생활에서 내가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실행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행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 사도의 말을 빌리지 않고서도 실로 헛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브리서는 노아가 믿음으로 장래 사실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장래 사실에 대하여 알려주고 지시했을 뿐이다. 노아가 “믿음으로” 장래 사실을 알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장래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말이요, 따라서 여기서 노아의 믿음은 노아의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노아에게 나타나서 장래 일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는 1 차적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방주는 노아의 삶이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노아는 방주를 계획하는 단계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였고, 다만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았을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노아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창세기 6장9절 말씀이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 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이나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얻은 칭호일 뿐 그가 의인이었기 때문에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적도 없고 십일조를 드린 적도 없다.

 


다만 하나님과 동행했을 뿐이다. 항상 하나님 곁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묵상했을 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은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육신에 있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려면 육신을 쫓아 사는 삶이 아니라 영을 쫓아 사는 삶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느냐 이다. 매일 육신의 일로 머리와 가슴이 가득 차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짓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삶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재물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마 6:24). 재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재물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있었고-이것이 그의 믿음이다-이러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노아가 아직 보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경고와 책망이 없으면 그는 참 아들이 아니요, 사생자이다(히 12:8)

 


믿음은 보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경고와 책망이다.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하심이 없었다면 노아와 그 집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이런 하나님의 지시와 경고에 대해 무지하면서 노아가 방주를 지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있다.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을까. 교회출석이 중요한 것도, 기도나 전도가 중요한 것도 아니며 헌금을 드리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세의 의인이던 노아 같은 사람이 받은, 보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내게 있느냐 하는 점이며, 하나님의 의를 아느냐 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의(믿음)를 모르면서 신앙생활만 강조하면 반드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게 된다. 신앙은 열심이 먼저가 아니고 지식이 먼저다(롬 10:2-3). 방주에 대한 설계가 없는데 어떻게 방주를 지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예배드리기 전에 말씀을 알아야 하고 기도하기 전에 성경 앞에 앉아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는 요소가 바로 예배며 기도며 충성이며 봉사며 헌금이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모르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노아의 믿음이 이런 종류의 믿음은 아닐 것이다. 노아가 오늘날 믿는 이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나 기도를 드렸을까? 아니면 헌금을 드리고 금식을 해서 장래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았던가? 그러면 지금이 노아의 때와 다른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방주에 대하여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무슨 나무로 지을 것이며, 가로 세로 높이를 어떻게 할 것이며, 심지어 창문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다시 말하면 노아는 방주를 짓기 전에 이미 완성된 방주의 모습이 마음속에 완벽히 그려져 있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은 완성된 방주와 그 방주의 설계도 사이의 관계와 같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방주의 제도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노아는 완성된 방주를 마음속에 그리게 되는데, 이 방주의 실체가 믿음이며 주님이 노아에게 보여주신 계시이다.

 

노아가 지은 방주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시기 위한 참 방주의 그림자와 모형이라는 점이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을 말한다. 곧 노아는 방주라는 모형을 지으면서 그리스도의 참 형상을 바랐던 것인데 이 참 형상이 노아의 믿음이었다는 말이다. 노아가 이러한 방주를 지었던 것은 기도를 했거나 금식을 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알려주심(곧 믿음) 때문이었다.








믿음은 실제를 사는 삶이라 하시는 주님




히브리서는 노아가 그 집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노아의 삶이 아무리 완전했고 당세의 의인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러한 경고를 무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계획에 대하여 그럴 수 있다 인정은 했다손 치더라도 구체적으로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심판계획을 알고 있으면 무엇할 것인가?

 


비가 올 때 자기를 건져줄 방주가 없으면 심판 사실을 알았건 몰랐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모르고 지내는 것이 훨씬 속편하고 아쉬움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그 말씀대로 살 수 있을 때 비로서 적용된다. 방주를 예비하라고 했으면 실제로 방주를 예비해야 그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 말씀에 감격해 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말씀을 믿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아 하나님 내가 당신의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방주를 지을 돈이 없습니다” 거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같은 변명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머리 속으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만사 형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아가 방주를 머리로만 지었을까. 아니면 엿새동안은 열심히 돈 버는 일에 종사하고 주일날만 방주를 지었는가. 하나님의 경고가 노아에게 임한 후 노아의 삶은 전체가 방주 짓는데 투자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방주가 증명해 줄 문제이지 내가 하나님을 잘 믿노라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노아의 삶처럼 방주 짓는 일에 전적으로 투자되고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머리 속으로만 계산하고 앉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안 믿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늘날과 똑같은 삶을 살았다. 노아와 함께 방주에 타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6-28)




노아나 롯의 때가 지금이나 마지막 때와 사람들의 하는 양상은 같다. 노아나 롯이 구원받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당신을 관념이나 지식적으로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대한 책망이 아니다.

 


그들이 머리로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는 얘기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는 얘기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먹고 마시는 삶과 교회 나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결혼하는 일과 성경 보는 일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돈을 벌고 집을 짓는 일이 더 중한가 아니면 하나님 믿는 일이 더 중한가. 신앙생활은 둘 중의 하나이지 둘 다가 아니다.

 


우리는 방주 짓는 일과 자기 집 짓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믿음이란 선택이다. 자기 집 짓는 일을 가지면서 다른 것을 더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 집과 방주 중의 하나를 버리는 선택이다.(마 6:24-34)

 


신앙은 관념(지식적 믿음)이 아니라 삶이다. 방주의 필요성이나 방주의 설계에 대하여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삶에서 방주를 지어 가는 과정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데 어떻게 사고 팔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6장 25-26.3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공중의 새처럼, 들의 들꽃처럼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적용되는 말이다 공중의 새는 하나님의 먹여주심을 믿기 때문에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다. 들풀 역시 하나님의 입히심을 믿기 때문에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1년 먹을 양식을 쌓아 놓고서도 노후를 걱정하고 평생 입을 옷을 가지고도 옷을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수밖에 없다.

 


노아시대 사람들이나 롯의 때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머리 속으로만 믿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한 뼘 길이도 안 되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메여 못했을 것이다. 노아 시대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노아 시대에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불쌍히 여길 자격이 없다.

 

방주는 꿈속에만 짓는 것이 아니다. 방주를 짓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력뿐만 아니라 나가서는 자신의 삶을 몽땅 투자해야 한다. 그렇다고 생활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명예가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보이느니 비웃음이요, 들리느니 잘못되었다는 걱정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멀쩡한 산 속에서 우리의 한 평생보다 먼 훗날을 위하여 방주를 짓는 일이다. 노아의 삶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미친 자의 삶이었듯이 오늘 날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한다.

 


오늘 날 하나님을 믿는 문제는 오히려 당당하고 떳떳하다. 전혀 비웃음의 대상도 아니고 근심의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 꿈속에서만 방주를 짓고 관념(지식)으로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꿈을 꾸건 무슨 생각을 하건 표현만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되거나 그 표현이 사회 대중의 인식체계와 다른 것이면 온갖 비웃음과 비난이 퍼부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방주를 지을 수 없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방주를 예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 삶의 일부를 쪼개어 드리는 열심이나 헌신의 차원이 아니다. 방주 짓는 일은 자신의 삶일 뿐이다. 삶에는 열심이고 헌신이고가 없다.

 


열심이나 헌신은 모두 삶이 아닌 어떤 행위들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방주 짓는 일은 열심히 할 일도 아니고 삶을 쪼개어 할 일도 아니다. 세상사는 일은 그렇게 할 수 있어도 방주 짓는 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방주는 삶으로 지어야 한다. 어렵다고 안 할 일이 아니고 힘들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아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숱한 세월동안 지었던 방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도 순전히 그들에게는 방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쫓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고 할 때의 “이로 말미암아”는 곧 “방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했을 그 방주가 세상을 정죄하고 노아로 하여금 믿음을 쫒는 의의 후사가 되게 하였다. 노아의 이러한 삶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인류의 멸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구원이 있기 때문에 멸망의 의미가 있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불신의 의미가 있다. 노아의 이러한 삶은 세상 사람들의 변명을 막아 버렸고 그들의 죄를 핑계하지 못하게 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예수처럼 살지 않는 믿음은 모두 지식일 뿐이다. 예수는 민족주의자도 애국자도 아니었다. 다만 한 알의 밀 알로서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버렸을 뿐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집을 지었지만 노아는 그의 목숨을 포기하고 방주를 위하여 살았던 것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일로 핑계할 수 있겠으며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로 변명할 수 있을까.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는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돌아와 내가 들어간 교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식의 포로가 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포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아는 지식으로부터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는 비유이다. 지식으로 밤을 세우는 지식 경연장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나올 수 없다는 뜻의 고봉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삶이 없었다. 지식에 붙들려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 지식이 올무가 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은 무엇인가 알려고 하는 지식욕에 빠지기 쉬운 동물이다.

 


한번 지식에 빠지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중국교회에 있었더라면 노아 형제님을 만나보시라는 권면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삶이 따라주지 않는 신앙생활은 빈 껍데기이다. 우리는 주님을 살아내야 한다. 지식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모든 저작물의 주인이신 주님




나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돌아왔다. 중국교회의 어떤 것도 보이는 실체로서 들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보고 느끼고 살았던 삶의 기억만을 들고 돌아왔다. 한국 땅 어디에서 이러한 무리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다만 돌아오기 얼마 전 자매 한 분이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집 자매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중에 넘겨준 책 한 권이 전부이다.

 


중국 가정교회에서 발행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시다(話在肉身顯現)”는 1549쪽 분량의 중국어로 된 책이다. 이것을 번역하여 출간한다면 4천 쪽 이상의 분량이 될 것이다. 중국 교회에 대한 그리고 그곳 형제들에 대한 생각이 들어올 때,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열어보는 습관이 있다.

 


최근에 펴낸 것이지만 중국 안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중국 교회 안에서 전해진 수많은 형제들의 체험과 간증, 말씀들이 담겨져 있다. 얼마나 꿀과 같은 말씀들인지 밤을 세우며 읽곤 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어느 말씀이라도 어느 누가 했다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적고 있다.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사실 누가 이런 말씀을 어디에서 한 것일까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 알고 싶은 충동이 책을 읽을 때마다 생겼다.

 


한국에 돌아와 내가 선택한 교회에 갔을 때 그곳은 가히 요셉의 창고라고 부를만큼 놀라운 메시지를 담은 도서와 문헌들이 즐비했다. 잠시지만 나는 이런 메시지를 누리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책자들의 거의 전부에는 누가 어디에서 전한 메시지 내용이라는 것과 그  책 가운데에서 심지어 그 말을 한 사람이 대단한 사도로 소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였다. 하나님을 무던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책이라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을 너무 들어올리는 마치 바벨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식상했다. 지식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지식 경연장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믿는 교회의 대장은 이렇게 지식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떠드는 것 같았다. 그러니 흩어지지 말자 하는 이야기는 없지만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책 가운데는 하나님을 얘기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어느 날 중국에서 가져온 책을 보면서 이 책이 워치만 니 형제의 메시지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 니 형제님과 동역하신 열 두어 형제님들의 글들이라는 것도 어렴픗이 알게 되었다.

 


니 형제님의 몇 가지 대표적 저작들이 요약되어 들어있는 것이 단서가 되었다. 그런데도 왜 워치만 니 형제님의 이름이 1500여 쪽이나 되는 책 가운데 한번도 들먹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기보다 아쉬움이 있었다.

 


이 아쉬움은 내가 중국에 다시 들어가 노 형제님과의 대화에서 풀렸다. 니 형제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3배여 권이 넘는 저작을 넘기셨지만 한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신 일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모든 말씀들이 집회가운데에서 주님의 임재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직접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니 형제님이 나중에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니 형제님이 저자가 될 수 없다고 고집하셨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니 형제님은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 서문에 이것은 자신이 저술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계셨다.

 


니 형제님은 여러 번의 간증을 통해 모든 말씀들이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평소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면서 많은 말씀의 구절들을 알고 계시기는 했지만 그것을 본인이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집회가운데 영의 흐름이 있을 경우, 본인도 모르는 사이 자신과 신실한 주변 형제들의 입을 통해 주님이 토해 내셨다는 것이다. 단지 입을 빌려주었을 뿐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니 형제님은 집회 가운데 토해낸 말씀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정리하면서 책이 된 것이라고 하였고 결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니 형제님의 아름다움은 변함없는 형제 사랑을 몸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집회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을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시고자 하는 마음은 대단하셨다. 형제들의 입을 통해 나타나는 주님의 생명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책이라는 창고에 보관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직접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각지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겠다는 불타는 사랑이 있었다.

 


형제님의 건강 상태는 집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누어있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는 많은 증언들이 있다. 형제님의 건강은 극히 좋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집회에서 나오시는 대로 연필을 들고 집회 가운데 선포된 주님의 말씀들을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정리했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 선포된 말씀들을 정리하는데 며칠 밤을 새우는 일은 보통이었다. 원고가 완성되면 같이 말씀을 나누었던 형제들과 주변 분들에게 원고를 넘기고 빠진 글과 잘못된 것, 보충해야 할 것들을 찾아보라 하시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는데 며칠을 소비하시곤 했다.

 


오늘날처럼 녹음을 해 둔 것도 아니고 타이프를 한 것도 아니다. 손으로 어려운 한문자 하나 하나를 펜으로 써야 했다. 말씀 전하는 시간외에는 원고를 정리하시느라 방에서 나올 시간이 없었다. 평생의 그의 사역의 일과는 이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수입의 1/3을 책을 구입하는데 할애하셨다. 잠자는 최소한의 공간을 제외하고 는 모든 곳을 책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앞서간 사역자들의 거의 모든 책을 탐독하셨고 주님의 편에서 필요한 실행들은 그것이 어느 교파에서 나왔던 서슴없이 교회 안으로 들고 들어 오셨다.

 


그의 뛰어난 영은 이러한 사역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니 형제님의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날 그분이 남긴 뛰어난 하나님의 말씀과 삶에 기초한 증거의 말씀들을 우리가 맛볼 수 있을까 싶다.

 


문서 사역은 영을 해방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케 한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오늘날 영적 인물들의 전부가 문서사역에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 분들이다. 그들이 자기 이름을 저서 위에 남겼다면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니 형제님은 어떤 이름도 남기지 않으시려 했다는 말에서 그의 형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주님은 한 사람의 영적 거물보다 부족하지만 여러 사람의 동역을 통해서 그분을 표현하신다. 주님은 이 시대에도 참으로 이런 통로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그의 영으로 풍성하게 하며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한다.

 


그렇다. 우리의 집회 가운데 나타나는 주님은 우리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주님은 아니다. 주님이 우리 입을 빌려 토해내는 말씀들이다. 이것이 어찌 내가 했다고 내 이름으로 출판할 수 있을까. 요즘 같으면 저작권법 위반이고 그렇다면 도둑이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오직 주님 한 분만 나타나야 한다. 인간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만을 앙망하며 그분만이 나타나기를 빌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모든 저작물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풍성한 주님의 상으로 인도하신 주님




지난 몇 년간의 일을 생각해 보면 모두 주님의 긍휼이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직장과 모든 것을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시련에 부딪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한국 땅에 붙어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 몰렸다.

 


결국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 땅으로 나가게 되었다. 본래는 인도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고자했던 곳이 인도와 파키스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간 난 교회생활다운 교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내가 속한 교회는 온통 돈이 주인이었다.

 


주님의 임재도 잠시였다. 생활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교회가 이 정도니 이런 상황에서 떠나고 싶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 자리에 돈과 사람이 앉았고 이런 하나님이라면 믿고 싶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그간 불교도 기독교도 믿어 보았지만 모두 헛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힌두의 깊은 인생철학에 마지막 생애를 걸고 싶었다. 세계 최고의 철학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힌두교 본산 인도 바나라시(Banarashi) 대학에 가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 보고 싶었다. 인도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중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하얼빈은 드넓은 평지 위에 건설된 도시이다. 인구 700만이 사는 큰 도시가 학교 5층 옥상에 올라보면 도시 저편 지평선 위로 논밭이 보였다. 20여 층이 넘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나를 오라고 하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서울 남산에 올라 보면 나와 관계된 곳이 많았고 나의 꿈과 나의 희망을 영글게 한 곳이 많았다. 그러나 하얼빈 그 넓은 곳에는 내가 아는 이도 나를 반기는 이도 없었다. 나그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일용할 물건 이외에는 사지 않았다. 사 보아야 가지고 다닐 일이 컸다.

 


아무도 모르는 중국 땅에서 내 것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어 하나님은 죽었다고 소리 질렀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외딴 섬에 버려진 사람처럼 고통과 외로움이 가득했다. 내게 온 환경은 혹심하였다. 울었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그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창세기를 보면서 주님께서 그의 풍성한 상을 보이시려고 내게 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이국땅에서 넘어지기 일보 직전에 주님은 그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드시고 풍요로운 상 가운데로 나를 인도해 주셨다.

 


주님은 나를 중국교회 안으로 인도하시고 그의 풍성한 상을 보여 주셨다. 야곱의 집을 애굽의 풍성한 상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계획과 같은 것을 느꼈다.

 


창세기의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였다.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된 뒤에 7년 풍년동안 곡식을 많이 쌓아 두고 직접 파는 이야기는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눈을 주셨다. 나는 왜 총리가 된 요셉이 직접 나가서 곡식을 팔아야 했을까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곡식들은 애굽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요셉은 기근에 굶주려 있는 자기 아버지와 형들이 언젠가 이곳으로 올 것을 미리 알고 곡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7년 풍년이 끝난 후 7년 흉년이 시작되었다.

 


애굽에만 흉년이 온 것이 아니라 중동 전 지역에도 흉년이 왔을 것이고 아버지와 형들이 사는 가나안에도 흉년이 왔을 것이다. 혹독한 흉년으로 애굽 백성들이 양식을 달라고 울부짖었고 요셉은 그들에게 양식을 팔았다. 형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 또한 양식을 사기 위해서 요셉에게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형들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굽으로 왔다. 성경에 그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왔다는 말은 한 줄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그간 가나안에서 양식을 구하여 먹고도 떨어져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 돈을 만들어 애굽에 왔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다 해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애굽으로 왔을 것이다.

 


그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와 요셉 앞에 섰지만 애굽에 판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요셉은 형들이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총리가 외국 사람들에게 직접 양식을 팔았겠는가? 형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요셉이 양식을 직접 팔 때에 애굽의 신하들은 요셉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총리각하, 이런 것은 우리가 해도 안 되겠습니까? 이런 일은 저희가 해도 충분합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요셉은 직접 양식 파는 일을 했다.

 


요셉의 마음은 양식을 파는 일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형들을 만나는 것이었다.주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마음이나 다를 게 없다.

 


형들이 요셉 앞에 서게 되었다. 창세기 42장 8절에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했듯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전혀 몰랐다.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지만 총리가 자기들이 애굽에 팔아먹은 요셉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욱 요셉이 어떠한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형들을 기다리며 양식을 팔고 있던 요셉은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나는 창세기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왜 요셉이 형들에게 내가 바로 당신들이 판 요셉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가 의문이었다.

 


형들이 바라는 것은 다만 양식을 사다가 굶주린 가족들과 먹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목적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쪼록 형들은 양식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요셉은 형들이 양식을 가져가도 기근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왔으니 양식만 구하면 된다는 마음이었지만, 요셉은 양식만을 줄 수 없었다.

 


요셉은 형들과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들은 정탐들이다."라고 하였다. 형들은 "아이고, 아닙니다. 우리는 열두 형제인데 하나는 없어졌고 하나는 지금 집에 있는데 우리는 참 독실한 자이고 한 사람의 아들입니다. 라고 자신들의 정당함을 이야기했다. 형들은 도대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었다.








  환난 가운데 기쁨을 주신 주님




과거 나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즐거웠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놓아두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분이셨다.

 


분깃을 가지고 멀리 집을 나간 탕자인 나를 매일매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먹을 것이 풍족하고 하는 일이 형통한 나는 아버지 집이 생각날 리 없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를 어려운 환경 가운데 집어넣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서 소망이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위치 속으로 넣으셔서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셨다. 밤이 어두워야 하늘의 별들을 더 또렷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내 주위의 모든 사실이 어려워졌을 때 하나님이 정말 내 마음속에 분명히 살아 일하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던 것처럼 요셉 또한 그랬다. 요셉은 양식을 조금 사 가지고 가서 먹고 또 사러 오는 형들의 계획대로 놓아둘 수 없었다. 앞으로 5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는데 양식을 사러 온다면 돈도 모자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형들의 요구를 충분히 알았지만 형들의 요구대로 해줄 수 없었다.

 


요셉이 “형님들, 내가 요셉입니다." 라고 자신을 알리면, 형들은 기뻐하기보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한 행동에 대해 요셉이 보복할 줄 알고 두려워할 것이었다. 그러면 당장은 양식을 사 가지고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애굽에 내려 올 수 없다.

 


결국 가족들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형들에게 양식을 주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요셉(주님)은 그의 식구들이 양식이 풍족한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베냐민을 오게 하고 베냐민이 있는 가운데 자기를 알려서 가족들을 다 애굽에 오게 하여 살 수 있게 하는 계획이었다.

 


때문에 요셉은 양식을 사러 온 형들에게 너희들은 정탐이니라 하고 이야기하였다.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아니하면 결코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형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겪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 또한 내게 닥친 환경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저 괴롭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다만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요셉 형들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늙은 아버지와 동생이 양식을 사러 간 그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가 더 걱정이었을 것이다. 양식을 구해 가지고 간다는 것은 사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형들의 계획과 요셉의 계획이 전혀 다른 것처럼, 요셉은 형들을 아나 형들은 요셉을 몰랐던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처지를 아시나 나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나를 나의 계획과 전혀 다른 당신의 계획대로 이끄셨다. 하나님이 나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중국까지 인도하셨던 것은,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왜 내게 그런 고통을 주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생각하기도 했다. 얼마 후 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주 앞에 엎어졌다. 주여 감사합니다. 라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으로 인해 불편하고 어려웠다.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돌아가는 길에 양식 자루 속에서 돈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왜 하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당케 하셨는가" 하면서 더욱 두려워했다.

 


저희가 시몬을 인질로 잡혀두고 베냐민을 데려온다고 하고서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때 형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는가. 집에 돌아가 아버지를 어떻게 뵙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요셉을 팔고 난 후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았던 그들이다. 집에 돌아가 야곱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야곱은 또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너희들은 나로 자식을 잃게 하는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몬도 없어졌고 이제 베냐민까지 또 데려가려 하는구나."하면서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고난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곱 집의 모든 고난과 고통은 주님이 우리를 그 분 가운데로 이끄시는 계획이었다. 야곱의 집이 흉년으로 고통과 고난을 당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풍성한 상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다.

 


우리가 원망하고 괴로워할 일이 아니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었다. 야곱이 괴로워하고 슬퍼했던 것은 요셉(주님)이 누구인지도, 요셉(주님)이 왜 그렇게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셉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나의 계획이 아닌 귀하신 주님의 계획으로 나를 하나님의 풍성한 상으로 이끌고 계신다. 그것이 당장 내가 볼 때는 고통스럽고 힘들며 환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 주님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넣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려 함이 아니요 그분의 풍성한 상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일 뿐이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3-8)

 


형들이 요셉을 판 것도 주님의 계획이다. 자신을 판 혐의로 근심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라고 형들을 위로한다. 내가 당하는 환난과 고통이 결코 나의 환난과 고통이 아니었다.

 


그분의 풍요로운 상에 참여시키려는 주님의 놀라운 계획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어떠함과 그로 인한 고통이 아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한 고난과 고통을 즐거워하고 찬양할 수 있다. 내게 오는 고난과 고통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었을까? 실로 주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이었다.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 http://www.ilovejesu.net/china/wchina09.htm 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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