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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5-27 15:56
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 (7)
 글쓴이 : admin
조회 : 4,703  
   http://www.ilovejesu.net/china/wchina07.htm [1096]
섬김은 몸으로 실행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형과 아우를 비교하여 아우가 형보다 낫다는 말에 형은 서운할 터이지만 아비보다 나은 아들이라는 말에 서운해 할 아비는 없다. 아비가 아들보다 큰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는 아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섬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며 섬김은 형제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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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의미를 알려주신 주님

중국어에는 우리말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존칭어가 없다. 영어와 같이 아버지보고도 너, 아들보고도 너이다. 일상의 대화가운데 무엇이 공손한 말인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외국인이 말을 배우면서 우리 나라에서처럼 존대어를 잘못 사용하여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나이 든 형제님들과 어린 형제들과의 대화를 가까이서 들어보면 마치 동년배들이 말을 트고 하는 것과 같이 거침이 없다. 그렇다고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본 일은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섬기고 산다는 느낌도 없었다.

 


중국에서는 나이 든 형제님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후미진 부분을 치우거나 정리하는 일 등은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중국교회에 들어와 노인 형제님들이 어린 지체들을 맡아 봉사하거나 형제들을 위해 몸을 아끼시지 않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

 


노 형제님과 같이 진흙 창이 된 신발을 조용히 닦거나 오가며 구석진 곳을 쓸고 닦는 것을 보는 일은 작은 떨림이었고 충격이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보는 것과 같았다.

 


나도 이러한 섬김을 실행하고 싶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다는 말씀이 더욱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 마음에는 형제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데 막연했다.

 


섬긴다는 말은 알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섬김인가를 알지 못했다. 후미진 곳을 찾아 뭔가 해보려고 찾아보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은 신발정리라도 하고 마음먹고 입구에 가보면 신발장은 이미 깨끗하였다. 할 일이 없었다.

 


예전 한국에서 성도 섬기기라고 야단스럽게 했던 운동이 생각났다. 명목은 어려운 형제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하는 것이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회사의 빚을 갚는데 사용했거나 했다. 그러나 헌금은 중국형제들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내가 하기에 합당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 헌금을 했지만 섬긴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이 나의 기도가 되었던지 시작 집회 중에 “주여 섬기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를 두어 차례 했다. 응답이 없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어느 날 노 형제님이 옆을 지나시며 “많이 먹고 어서어서 자라세요” 라고 말씀하신다. 늘상 하시는 이야기려니 싶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에 “형제님 전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는 진실로 주님을 섬기며 살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대답은 여전히 “형제님 많이 먹고 어서어서 자라세요” 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번 얘기도 이번 이야기도 모두 내 기도에 대한 반응이셨던 것이다. 섬기는 것은 곧 많이 먹고 자라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의 관심은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것보다 많이 먹고 어서 자라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었다.

 


어느 날 주님은 내 눈을 열어 주셨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요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에 살면서 나는 그간 비교적 섬김을 받고 살았다. 그러나 나와 같이 작은 자는 결코 남을 섬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그것이 바로 섬김이요 그래서 섬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다. 그렇다. 나 같이 작은 자가 감히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말도 안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서어서 자라야 하는 것이다.

 

섬김은 몸으로 실행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형과 아우를 비교하여 아우가 형보다 낫다는 말에 형은 서운할 터이지만 아비보다 나은 아들이라는 말에 서운해할 아비는 없다. 아비가 아들보다 큰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는 아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섬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며 섬김은 형제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큰 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섬길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많이 먹고 빨리 자란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섬김을 원하신다. 주를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를 바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나같이 작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인지 풀리지 않았다. 어느 날 형제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마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려운 형제를 그냥 지나치기 일수이다. 주님은 한번도 자기를 위하여 나의 목숨을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안으셨다. 주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사울을 향하여 다메섹 도상에서 말씀하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4-5)




주님은 주님의 형제를 핍박하는 것이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형제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보이는 주님의 형제를 섬기는 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김이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기는 것은 믿음이며 보이는 주님의 형제를 섬기는 것이 실행이다. 보이는 형제들을 섬기는 일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긴다. 우리 안에서 섬김을 받는 자들은 앞 선 자들이지 어린자들이 아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은 쉽지만 실제 어린 지체를 섬기는 일이 쉽지 않다. 세상에서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작은 자가 아니라 큰 자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




주님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가운데 가장 작은 소자, 어린아이가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다. 작은 소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작은 소자를 섬기는 것은 작은 자가 자라도록 하는 일이다. 자라도록 돕는 것은 먹여 장성하게 하는 일이다. 떡으로 작은 이를 먹여 장성하게 하는 일이다. 어떻게 먹일 것인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일이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 번제단을 통과하고 물두멍을 거쳐 성소 안으로 들어가 빛 가운데 서야 한다. 그리고 떡 상 앞으로 나아가 주님이신 떡을 나누어야 한다.

 


주님은 성소 안에서 작은 자에게 자신을 먹이시며 장성하게 한다. 우리의 자람은 주님이신 떡을 먹는 것이며 누리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주님이신 떡을 같이 나누는 일이다. 결국 어린 자로 더불어 떡을 나누며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하는 일이 곧 주님을 섬김이며 형제를 섬김이다. 주님과의 깊은 교통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일이 곧 형제를 섬기는 일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주님이 공급하신다. 주님이 기르신다.

 

 

 형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헌금을 하여 어려운 형제들을 돕거나 나의 행위로서 나타나는 것은 진정한 섬김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로 돌아보라고 말씀하신다. 형제를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섬김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 안으로 들어가 형제들로 더불어 주님의 떡을 나누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어린 자들로 자라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섬기는 첩경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같이 나누며 주안에서 지어져 가는 일이 곧 형제를 섬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먹고 자라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고 곧 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 그렇다. 우리는 장성하도록 자라야 한다.

 


어느 날 노 형제님은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라고 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피를 마실 때 섬김을 완성한다고 하셨다. 실로 난 이 말씀을 터득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많이 먹고 어서어서 자라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자라면 자랄수록 또 다른 주님이 우리가운데 오셨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다가왔다. 우리는 한 자리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계속 전진해야 한다.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곳까지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

 

나는 솔직히 형제를 위하여 내 목숨은커녕 내가 가진 물건 하나 내놓기도 망서려 지는 사람이었다. 중국 형제님들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나을 것이라는 우월감은 있었지만 하는 것은 너무 가난하였다. 그러나 형제님들은 가난하였지만 부자였다. 서슴없이 주셨다. 주는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알아도 무엇인가 남에게 자기 것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쉽지 않았다.

 

집회소 안에서 가장 부자는 첸형제님이셨다. 형제님은 주일날이면 앞치마를 두르고 종일 주방에서 음식을 하셨다. 오실 때 작은 수레에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가득하게 싣고 오셨다. 그리고는 식사시간이 가까워 오면 뒷마당 주방으로 가셔서 맛있는 요리를 해 형제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셨다.

 

나는 형제님이 큰 부자로 생각되었다. 어느 날 어느 형제님을 따라 시장에 갔는데 그곳에 첸형제님의 고기집이 있었다. 고기를 사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님과 함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멀직이서 열심히 고기를 썰고 계시는 첸형제님이 보였다.

 

그런데 고기집이 큰 것이 아니었고 형제님은 부자도 더욱 아니셨다. 그런데도 형제님은 주일이면 어린 형제님들에게 큰 기쁨이 되어 주셨다. 여러 고기집이 있는데 첸 형제님 고기집에만 긴 줄이 서 있었다. 왠 일이냐고 물으니 다른 것이 아니고 첸형제님은 저울이 높이 올라갈 대가지 고기를 달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산인해라고 한다.

 

중국에는 무엇을 하나를 사려고 해도 반드시 저울에 단다. 시장에서 오이를 사도 수박 한덩이를 사려도 저울에 달아 무게에 따라 값이 나온다. 나중 알고 보니 저울 눈이 높이 들려도 50g이 더 않나간다고 한다. 그 50g 때문에 형제님 집 앞은 인산인해였고 그로 인해 주일 날 집회소는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올 때 형제님의 고기집은 두배도 더 넓어지셨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몰라도 인색하였다. 가진 것이 없어서 그랫을까. 아니면 내 것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하여튼 나는 무엇 하나 마음에차게 누구에게라도 주어보지 못했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너무 돈에 매달려 살아서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했다.

 

식사를 할 때 보면 눈물겹다. 풍족한 살림살이가 아니어도 마음쓰임이 넉넉하고 풍요하다.반찬 하나라도 더 접시에 담아주려고 애를 쓰신다. 밥이 부족할 때는오히려 밥이 남아도는 촌극을 여러번 보았다. 밥이 부족한 느낌이라도 든다 싶으며 감자 한두 개만 들고 밖으로 나가셔서 소금에 찍어 드신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 아파트 재활용상자에 한달이면 수없이 많은 옷가지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내 아내가 가끔 통을 뒤져 괜찮은 옷가지를 가져다가 정갈하게 빨아서 자기도 입고 아이들에게도 입히곤 하였다. 떨어진 옷이 없다. 유행이 지나서 버린 것이지 떨어져 입지 못하여 버린 것은 거의 없다. 이를 볼 때마다 어렵게 사는 중국형제님들이 생각이 났다.

혼인이나 집회소 잔치가 있을 때면 멋을 내고 오신다고 오셨겠지만 남루한 옷가지를 보면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난 어느날부터 상자를 뒤져 입기에 좋겠다 싶은 옷을 가져다 쌓아두고 말끔히 세탁하고 다림질하여 비닐로 포장하여 두었다. 중국에 들어갈 때면 몇 상자씩 가지고 들어갔다.

 

옷을 가지고 들어갈 때는 많은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이 옷을 입고 얼마나 즐거우실까 생각하면 가지고 가는 짐이 가볍게 느껴졌다. 특히 따뜻한 내의를 가지고 갈 때나 마음에 드는 외투나 양복을 가지고 들어갈 때는 한껏 기대가 되었다. 특히 내게 잘해 주신 노형제님의 옷차람이 마음에 늘 걸리던 터였다.

 

중국에 도착하여 다로 준비한 옷가지 몇 개를 형제님께 인사를 드릴 겸 가져다 드렸다. 형제님은 그때마다 얼마나 고마워 하는지 모른다. 보는 내가 눈믈이 날 정도였다. 내 손을 잡으며 그 멀리서 자신을 생각하고 옷을 준비해 온 내 사랑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모습이다. 나머지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입을 수 있도록 집회소에 가져다 주었다.

 

주일 날 전체 집회소 사람들이 다 오는 날, 긴 줄을 메고 대나무로 만든 옷걸이에 내가 가지고 간 옷을 걸어두시고 집회가 끝나고 나면 한국형제님이 가져 오셨다며 마음에 드시는대로 가져다 입으라고 광고를 하신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옷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왠 일인가. 눈에  익은 몇 벌도 그곳에 걸려있는게 아닌가.  노형제님께 드렸던 옷마져도 입지 않으시고 가져다 걸어 두신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형제님과 자매님이 꼭 입으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렇다. 바로 그러한 분들이다. 한국산 옷이라면 그렇게  좋아하시던 분들이 어느 하나 만지지도 않으신다. 한참이 지나서 몇 형제님들이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차례로 호명하며 먼저 고르라 하신다. 겨우 가지고 간 옷의 1/3도 주인을 찾지 못하였다.

 

나머지는 다시 포장하여 먼 변방의 집회소로 보내신다 하신다. 이곳보다 더 어렵고 힘든 형제들을 위하여 보내야 한다는 말에 좋은 옷을 입은내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는 지 모른다. 어찌 그분들이라고 그 좋은 옷 한벌 골라입고 싶지 않으시겠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옷을 다시 포장하여 먼 곳의 형제들에게 보내시는 분들이다.

 

노 형제님 또한 예전 입으셨던 옷이면 더없이 좋으시다고 한사코 사양하신다. 난 눈물이 솟았다. 주님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한국 우리 교회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돌아오면서 생각해보았다. 아마 제일 좋은 것은 상자를 공개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골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얼마나 내가 형편없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없다고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멀리 떨어진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돌아온 분깃을 포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주님이 준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이러한 형제들 가운데 사는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어디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신앙생활 속에 나타난 주님

 

내가 본 중국은 궁색하였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큰상에 둘러앉아 상이 넘치게 음식을 시켜먹는 사람들의 집을 가보면 밥이나 국수 또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는 통만두 빵을 한두 개 짠지와 함께 먹는 정도이다. 대부분 하루에 두끼 정도 먹는다. 아침 겸 점심으로 10시쯤 먹고 점심 겸 저녁으로 오후 4-5시에 먹는다. 

 


형제들의 삶 또한 힘들고 어렵다. 60-80명이 모이는 교회 안에 성경이 10여권에 불과하다. 우리 돈으로 1,3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성경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살아내는 분들이 천금을 들여서라도 성경 한 권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없다.

 


않 사는지 못사는지 모르겠다. 하기는 성경이 모두 머리 속에 들어 있으니 살 필요는 없겠지만. 흔한 성경 해설서나 설교집과 같은 기독교 서적을 본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한국교회에 넘치는 것이 설교집이고 참고 도서가 아닌가 싶다. 교회 가운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는데도 신앙에 관련된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처럼 어렵게 생활하는 형제들이지만 주일 낮 점심상은 푸짐했다.

 


여기서 잠깐 중국교회 집회시간을 소개한다.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대집회가 시작된다. 오전 집회는 대개 오후 3시정도 끝나고 점심 겸 저녁식사를 한다. 성찬을 함께 한다. 대집회는 앞서 소개한 방법으로 집회가 유도된다. 집회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곳에서 같이한다.

 


어린아이들은 신앙이 오랜 할머니형제들이 어린이 방에서 돌본다. 그리고 오후 4시 정도부터 간증과 생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오가며 오래 된 형제들이 신앙이 짧은 형제들에게 교회사며 성경을 강론하고 노인형제들이 어린 학생들을 섬긴다. 오랜 신앙생활가운데에서 얻은 경륜과 지혜로 청년들과 젊은 아이들, 학생들을 보살핀다. 대개 저녁 8시- 9시가 넘어 끝이 난다.

 


중국 교회에서 내 가슴에 가장 큰 인상은 어린 자를 위한 깊은 배려이다. 교회의 대부분의 시간과 비용을 어린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장성한 자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선지 그들에 대한 배려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집회가운데 난해한 신언이 나오면 오래 된 형제님들이 곧 바로 일어선다.

 


나의 양육도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말도 쉽게 하려고 애를 쓰신다. 형제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정도의 수준 높은 교통은 대 집회가운데서는 하지 않는다. 큰 형제님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조용하게 교통을 나누신다. 집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어린 자들이다. 주님이 어린아이를 특별히 섬기라고 부탁한 뜻이 여기에 있는가 보다고 느낄 정도이다.

 


어린양이 양 무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인해 준다. 이야기하시는 분도 집회가운데 어린 자의 표정을 살피시며 말씀하신다. 무리의 가장 중심에 두고 먹기에 좋은 꼴을 분배해 주는 배려가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을 읽는 즉시 반복하여 설명해 주신다.

 


오래된 형제들 또한 지루해 하지 않는다. 시초부터 차근차근 성경내용을 설명한다. 흐르는 말씀의 수준은 높은데 말의 표현은 쉽고 자상하게 전달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주님의 마음을 읽게 한다. 오후 집회에서는 어린 자를 위하여 집회 내용을 다시 설명하여 주님의 마음을 전달하신다.

 


구차하다는 표정을 한번도 보지 않았다. 생활화되어 있다. 교회 안에 넣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인상적인 것은 이런 일들을 거의 연륜이 높은 형제나 자매들이 담당하신다. 양육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

 


연륜이 높은 분들이 이런 사역을 담당하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교회의 수준을 높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이다. 온유와 절제, 인내를 배우게 한다. 서두름이 없다. 내가 참으로 감사한 것은 형제님들이 나의 간증을 통해 나의 어떠함을 아시고서 몇 분 형제님들이 나를 보이지 않게 양육해 주신 것이다.

 

성경을 펴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치듯 형제님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신다. 그저 하시는 말씀이시겠지 하고 지나치면 몇 날 후 나를 다시 만날 때 다시 물으시는 것이다. 그 때서야 형제님이 나를 이끌고 계시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한분 만이 그러지 않는다. 여러 방면에서 여러 분이 이것 저것 내가 성장과정에서 알아야 할 것들을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시는 것을 느끼게 한다.

 


중국교회에서는 우리 나라와 같이 형제 자매라고 분리하여 부르지 않는다. 모두가 형제라고 부른다. 여자도 형제라고 부른다. 다만 필요할 때 남자형제 여자형제라고 구분할 뿐 주안에서 모두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노인 형제님을 소개하지 않았다. 금년 85세이시다. 구원받은 것은 27살이셨다니 이제 58년이 된다. 이런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니다. 구원받은 지 40년 50년 된 분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까 갓 교회 안에 들어온 초신자부터 60년이 다된 사람까지 다양하다.

 


한 마디로 중국교회사가 있다. 노인 형제님은 30대 때 니뚸생(Watchman Nee) 형제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다 한다. 내 눈에는 그분은 진정한 하나님사람이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많은 분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입을 열어 증거하지 않으셔도 그분 자체가 바로 성경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고린도후서 3장2-3절에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 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해되었다. 그분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였다. 편지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게 한마디씩 던지며 우리를 인도해 가셨다. 그분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님이 보낸 편지를 보는 것과 같이 그를 보면 주님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형제님은 언제나 점심에 감자 두 개씩을 가져 오셔서 물과 함께 드셨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 음식을 드셨다. 상위에 풍성한 음식이 있는데도 언제나 그랬다. 숫양이 마른 풀을 조금씩을 뜯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교회 안의 점심상은 언제나 풍성하였다.

 


어려운 형제들의 점심상이 어떻게 매번 이렇게 풍성할까 궁금했다. 그러면 많은 돈이 들텐데, 한편 십일조는 어떻게 하며 돈은 어떻게 사용할까 궁금하였다.

 

 



십일조에 나타난 주님







중국인들은 돈을 섬긴다. 돈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집집마다 재신(財神)을 모시고 있다. 아무리 없게 살아도 상당한 현금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돈이 없는 미래는 없다. 하루 2끼 식사를 하는 배경도 저축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옷 한 벌로 10년을 때운다. 중국인들만큼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없다. 대문 열쇠와 금고는 아마 중국제품이 세계 제일일 것이다. 

 


돈을 신처럼, 목숨처럼 섬기는 중국인들, 그 가운데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며 십일조는 어떻게 하는가는 내 관심의 초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돈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하였다. 특히 한국에서의 나의 신앙생활에서 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의 교회생활에서 교회는 돈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돈을 모으기 위해 집회를 하는지 집회를 위해 돈을 걷는지 분간이안갈 정도였다. 구원을 받자마자 돈 얘기부터 시작하였다. 어느 때는 너무 바브다는 생각을 가질만큼 그러했다. 돈을 걷우기 위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인지 혼란되었다.

 


중국 집회소에서 돈을 다루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십일조가 어떤 것인지 물었다. 역시 답은 간단했다. “신명기를 보세요” 이다. 아무리 신명기를 찾아보아도 신명기에 돈을 얘기하는 곳은 하나도 없다. 몇 곳에서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이라는 문장이 제일 가까운 부분이었다.

 


어느 날에는 “출애굽기도 보세요” 한다. 출애굽에는 십분의 일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이후 광야 생활가운데에는 소득이  없었다. 매일 만나로 먹이셨고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았으니 필요한 것이 없었다. 소용되는 모든 것을 주님이 공급하셨다. 아무 일도 안 했으니 생산이 있을 리 없다. 농사를 한 일도 장사를 한 일도 없다.

 

얼마 후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에 들어가고 난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 그 이후 스스로 농사를 하여 먹도록 한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그 수확물을 바치는 무엇인가가 십일조와 돈의 문제의 단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나를 본 노 형제님은 “형제님 신명기 7장부터 자세히 보세요” 하신다. 어느 일요일 집회에서 환하게 웃고 들어오는 나를 보신 노 형제님은 찾으셨군요 하며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오늘 집회에서 얘기를 해 보세요 하는 것이었다.

 


난 신명기 8장을 읽어보면서 밀과 보리 등 일곱 가지 산물이 나오는데 그것을 식물로 하는데 모자람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농작물이라고 생각했을 뿐 다른 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런 농사를 지어먹으라고 했나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샘이신 하나님과 분천이신 하나님, 시내이신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면서 좋은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대신 직접 경작해 먹으라는 산물의 의미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곧 그리스도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생활에서 누리는 것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8:7-10)




이스라엘이 주께서 약속하신 그 아름다운 땅, 곧 가나안에 이르니 그곳에는 골짜기에나 산지에나 어디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있었다. 생수이신 주님을 기억한다. 주님은 샘이시고분천이며 흐르는 시내이시다. 아름다운 땅에는 주님이 계시다.

 


생수의 근본이신 하나님인 샘이 있고 생수가 가득히 고인 웅덩이이신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시내이신 성령이 있으시다. 삼이일(三而一)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흐르는 시내는 분명 생명수의 강이다. 생명강의 흐름이 있다면 그곳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돋아날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곳 일곱 가지 산물도 당연히 생명을 의미하며 생명이신 주님 자신이다.

 


나는 용감히 샘이신 하나님, 분천이신 주님, 시내이신 성령을 증거 하였다. 그리고 생명강가에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 생명이신 일곱 가지 산물이 주님임을 증거 하였다. 밀은 무엇인가. 주님은 한 알의 밀 알로 이 땅에 오셨고 죽어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

 


밀은 만유이신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육신의 모양으로, 육신에 갇힌 모습으로 오셔서 온갖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주님이셨다. 보리는 찢어짐을 당하고 가루가 되고 보리떡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주님이셨다. 밀이 양으로 오신 제물을 얘기한다면 보리는 죽고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였다.

 

다음 포도는 무엇인가.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씨로 뿌려져 싹이 나고 줄기가 돋아 수많은 포도열매들을 맺히는 것과 같이 생명으로 연결된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말씀이다.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모두 주님이시다. 꿀 또한 식물의 생명(번식)을 동물의 생명(피)으로 연합한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직접 경작해야 하는 산물은 그리스도이다. 생명의 땅에 들어가 오직 그리스도를 가꾸어 그리스도를 먹고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땅 가나안의 생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유일한 식물임을 안다. 결국 식물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그것이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중국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나의 간증은 많은 중국 형제들의 기쁨이 되었다.곳곳에서 싱긋이 웃어주는 형제들의 얼굴에서 애굽에 있던 한국형제가 가나안 땅을 보았어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노 형제님도 “형제님 그것을 보셨군요. 주님 감사합니다.”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그리스도를 경작하여 먹고 마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곳으로 가지고가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었다. 경작한 산물가운데 가장 좋은 것의 1/10을 가지고 주님이 정하시는 절기와 장소에서 우리 종들과 아들들과 더불어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이 정하시는 절기와 장소는 주님을 예배하는 성회(엘루살렘)이다. 주님을 예배하는 장소에서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다. 레위인과도 함께 먹는 것이다. 십일조는 주님과 제사장과 우리 모두가 같이 누릴 수 있는 화목재물이다. 우리가 일요일 성회에서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이시며 우리의 영양소도 바로 여기에서 얻는다.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6-7)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너의 각 성에서 먹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신12:17-18)




십일조는 영 안의 생활 가운데 누리는 주님가운데 가장 좋은 것 1/10을 취하여 주님이 정하는(계시는) 장소에서 주님과 제사장과 종들과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좋은 것의 십일조는 무엇인가. 간증이다. 신앙생활에서 간증만큼 아름답고 탐스런 추출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을 경작하고 누리며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간증을 성회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이루어진 주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람하게 하고 먹이는 일이다 이것이 성회에 오는 사람들의 식물이 되는 것이며 서로간의 공급이 된다.

 

 


집회의 주인이신 주님




여기에 이르러 중국교회에서 행하는 집회형태가 이해되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러 온다.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 제물은 그리스도이다. 마찬가지로 예배를 드리러 온다면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과 제사장과 우리 모두가 만족할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중국교회 형제들은 제물이신 주님을 들고 예배를 드리러 온다. 집회가운데 주님을 열람하고 전람한다. 많은 이들이 일어서 주님을 간증하고 찬양하고 말해내는 것이었다. 참 예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제사요 예배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소득의 십일조가 십일조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의 십일조가 진정한 십일조였다.

 


우리는 그간 자신이 번 것의 십일조를 드렸다.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사실은 땀 흘려 일하여 번 돈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주님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여 먹으라고 하였다. 땀 흘려 일한 수고의 대가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가인의 제사이고 제물이다.

 


예배의 주인은 주님이다. 모든 예배가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드려지는 모습이다. 중국 형제들은 집회소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배드리러 간다고 표현한다.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해 간다는 표현이다. 주님께 나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는 표현을 가끔 듣는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주님께 드릴 제물이 필요하다.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 내 안에서 이해가 되었을 때 심히 부끄러웠다. 나는 그간 십 수년간 예배를 드린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배보러 다녔다. 하기는 우리 모두가 예배보러 간다고 말해 왔다.

 


우리는 예배를 보러 다녔다. 예배가 끝난 후 오늘 말씀이 참 좋았어 라고 말하거나 오늘 너무 지루했어 라고 말했다. 주님의 만족을 위해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나의 만족을 위해 교회에 간 것이다. 내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집회에 갔다. 주인이 나이다.

 


우리 나라 집회가 한사람이 말하고 여러 사람이 듣기만 하는 형태는 나의 만족을 위해 오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일 수밖에 없다. 제물은 목사 한 사람만 준비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준비된 제물이 만족스런 것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축구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축구 하는 것을 보러 갔다. 주인이 아닌 관객이었다. 내가 축구를 하러 간다면 빈 몸으로 가지는 않는다. 준비할 것이 많다. 그렇다고 축구를 할 운동장과 축구공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전략이 필요하다. 경기를 하는 사람들과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자기 위치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한다. 예배를 구경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축구를 직접 하러 가면 나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드러난다. 이런 부분은 내가 부족했구나 고 생각한다. 그러나 축구 구경을 가면 말이 많다. 누가 잘했고 누구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고 평가한다. 소리는 소리대로 지르면서 자기가 한 것은 없다. 자기 성장이 없다.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손님일 뿐이다.

 

예배는 나의 만족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러 가는 것이다. 내가 가꾼 주님을 드리러 가는 것이다. 나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의 만족을 위해 누린 그리스도를 들고 가는 것이다.  주님의 만족을 위해 우리는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예배에 제물 없이 간다. 제물 없이 장막에 들어가는 것은 사망이다.

 


제물 없이 성소에 들어간 이들은 죽음을 당하였다. 아니면 우리는 종들이다. 가난하고 분깃이 없는 종의 신분으로 성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지와 같다. 남이 가져오는 식물을 얻어먹는 자들이다. 예배에 귀만 가지고 간다.

 


이러한 예배에 참여하는 자라면 우리는 아직 모세의 인도아래 있다. 매일 내리는 만나를 주어다 먹는 자들이다. 우리는 예배에 귀만 가지고 가서 다른 이들의 말만 듣고 오는 가증스런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물론 세상교회가 거의 혼자 말하고 전체가 듣는 예배를 한다. 광야가운데의 교회의 행사이며 어린 교회의 증거이다.

 

주일 집회의 만찬상은 넘친다. 중국형제들은 집회에 참석하러 올 때 음식을 스스로 준비해 온다. 어느 누구도 빈손으로 오는 사람이 없다. 감자 농사를 짖는 사람은 자기가 생산한 감자농사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온다. 돼지고기 장사를 하는 사람은 가장 좋은 돼지고기를 들고 온다. 사과를 취급하는 사람은 가장 좋은 사과를 가져온다.

 

어느 날 나도 음식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사과 한 상자를 샀다. 가장 좋은 사과를 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질이 조금 떨어지는 사과를 가지고 갔다. 내가 중국형제들보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 사과 한 상자를 산 것인데 알고 보니 형편없는 짓을 한 것이었다.

 


그 때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것은 형제들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앞에 내놓는 나의 간증이었다. 세상의 장관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동의 동장님이 우리 집에 온다하더라도 이등 품 사과를 사서 대접할 것인가.

 


중국 형제들은 자기가 생산한 산물의 최고의 것으로 가져온다. 그러니 만찬 상이 얼마나 풍요하고 넘칠 것인가. 어느 사람은 감자를 들고 오지만 어느 사람은 고기를, 어느 사람은 과일을 이렇게 가져온 것이 쌓여 풍요한 만찬 상이 된다. 식사 전 몇 형제님이 축사하시고 음식을 드는 모습은 주님의 큰 잔치고 큰 기쁨이다.

 

설마 이러한 행사가 그림자일지라도 실제적인 십일조생활을 하기 위하여 그림자생활도 신실하게 하는 것이다. 매주 드리는 예배는 주님께 드리는 화목제이고 진정한 예배였다. 신언(申言 집회 중에 각자가 주님을 누린 이야기를 꺼내는 것)과 집회는 누린 주님을 진열하는 진열대였으며 주님이 나타나셨다.

 


때문에 그들이 한 사람 한사람 내어놓은 증거의 말이었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주님을 볼 수 있게 하고 주님을 나타나게 하였다. 예배는 주님이 주인이셨으며 주님(부활생명)이 나타나셨다. 나는 주님을 매번 보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주님을 보았다. 중국에서 나는 주님을 보았다.

 


중국 교회 안에도 돈으로 헌금을 하는 성도들이 있다. 현물로 십일조를 하기 어려운 일을 생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현금으로 십일조를 한다. 봉급생활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농사를 하는 분들은 언제나 풍족한 상을 만든다. 만찬상을 가득 채우는 음식을 준비한다.

 


그러나 돈으로 내는 것이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십일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십일조는 주님을 가꾸어 여러 형제들과 나누는 말씀(간증)이라고 생각한다.

 


돈으로 내는 헌금은 모두 연보(捐補)라 한다. 주님이 넘치게 부어준 것을 도로 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필요한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넘치게 주신 돈이라고 한다. 연보는 바로 넘치게 부어주신 돈을 헌금하는 것을 말한다. 먹고 살 공급을 제외한 나머지는 넘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맡겨둔다고 한다.

 


중국 형제들이 생각하는 재물에 대한 개념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연보를 십일조로 생각할 경우 자기 수입의 1/10을 연보로 생각할 수 있다. 한 달에 1,000원을 주셨다면 십의 일조인 100원을 연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마지 900원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연보의 개념이다.

 


그러나 중국 형제들이 생각하는 연보는 다르다. 연보가 넘치게 주신 돈이라고 생각하면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만일 매달 1000원이 소득이라고 하자. 여기서 가족ㅇ 없거나 용처가 많지 않아서 300원을 자신의 생활비로 지출하는 사람이 있다면 700원이 연보가 된다.

 


반대로 용처가 많은 연고로 매달 700원을 생활비로 지출되는 사람은 300원이 연보가 된다. 연보가 소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에 따라 결정된다. 소득이 같다고 하더라도 가족수에 따라 부양할 가족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연보는 교회의 소용과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는데 대부분 사용된다. 얼마가 들어 왔으며 얼마가 나갔는지 공개하지 않는다. 사람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고하지 않는다. 주님이 재물을 사용하시는 것과 사람의 의사로 재물을 사용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필요한 합당한 사용처를 찾으시지만 사람은 돈을 보고 사용처를 달리 생각하고 용도를 둘러싸고 분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의 여분이 있으면 필요 없는 곳에 쓰려고 한다. 돈이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그 범위 안에서 지출을 생각하고 용도를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지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재물을 어떻게 사람이 마음대로 용도를 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또 다른 경건함이 있다.

 


재물은 주임 형제님들이 관장하신다. 기도로 사용처를 주님으로부터 받으신다. 교회 안에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어려운 집회소와 교회를 돌보는데 보낸다. 내몽고에도 보내고 중국 변방의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해 항상 기도한다.

 


내 교회 안에서 나온 금전을 내 교회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주님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곳에 쓰이던 주님의 일에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재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철저한 원칙이 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일이 우선이다. 사람이 다수결에 의해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필요한 곳에 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의 사역에 필요하고 더 소용되는 지역에 보내어진다. 내 교회라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여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긴다.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 위해 연보를 모으는 사도행전의 기록들처럼 그렇다.

 


교회의 범위와 그릇이 크다. 그의 행정이 하나님께 미친다. 개인이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집회소와 교회 또한 그렇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그분이 쓰시게 한다. 때문에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만 고한다.



( http://www.ilovejesu.net/china/wchina07.htm 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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