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자 : 69 (회원 0)  전체순위 출근기록  오늘 101 어제 159 최대 1,215 전체 1,654,545  
클릭하시면 MAIN PAGE로 이동합니다.
설교/상담찬양AG자료기독교교육도서실세미나선교/교회결혼/가정미디어씨니어코너성경대학열린마당
AGKDCED > 선교/교회 > 선교 > 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 (5)
  AGKDCED LOGIN
  
  
  ID저장  자동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개척교회
교회홍보실
레크리에이션
선교
교계소식
성지순례
기독교변증
간증
교회성장
교회 탐방
역사의 교회
한국교회 순교/유적지
신학과 교회
북한
HOME  >  선교/교회  >  선교 
 
작성일 : 10-05-27 15:47
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 (5)
 글쓴이 : admin
조회 : 4,555  
   http://www.ilovejesu.net/china/wchina05.htm [1020]
세상 모든 것은 썩어지고 낡아진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주님의 아들들과 주안에서 하나로 연합될 때, 주님의 거처가운데같이 할 때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이 우리를 통해 표현되고 나타날 때 아름답다. 
 
...............................................................................................................................................

교통의 즐거움을 알려주신 주님

우리가 교통가운데 있다는 것은 주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거처이며 그분의 표현이다. 우리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교통 가운데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주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놓음이다.

 


생각해 보면 나의 교회생활 가운데 참된 교통이 있었는가 의문이었다. 우리 교제합시다 라고 같이 모여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본다. 자기 이름과 구원받은 날자와 구원받은 간증이 전부였다. 아니면 교회 안에 소용되는 돈을 거두기 위한 몇몇 사람들의 각본에 의한 선동적인 간증을 듣고 그 말에 찬동하느냐 아니냐가 생활간증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교통이었다.

 


주님이 나타나고 주님이 표현되는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열리고 그의 계시가 열려지는 교통은 없었다. 나의 신앙생활에서 교통은 친한 사람끼리 오랜만에 모여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앉아 꿀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교제가 아니라 사교모임이었다.

교통의 즐거움이 없었다. 솔직히 교통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는 시편 137편의 말씀을 상고해 보는 수준이었다.

 

형제가 연합한 것이 무엇이며 동거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다. 성령의 권위가 없었다. 성령의 권위가 없었다면 진정 교회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랐다. 나는 그런 교통가운데 살았다. 교회는 주님의 집이라고 하면서 그곳에는 사람밖에 없었다.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는 분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주님은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건져낸 참 생명이며 빛이시다는 것은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었다. 너희 두셋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으로 나갔지만 과거 내 경험은 친교모임이었다. 형제가 주안에서 하나로 연합한 것이, 주의 집에 머물 곳이 많다는 말씀 안으로 들어가 주와 더불어 동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말조차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중국교회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움은 형제들간의 부담없는 교통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부딧치는 문제들을 들고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풀렸다. 말 그대로 형제들의 모임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들과 같이 내일처럼 진지하고도 깊은 교통이 있다.

 


혼자서 처리하기 너무 버거운 그래서 악 소리라도 지를 정도로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매일 오후 시간에 집회소에 가면 형제들이 있었다. 저녁 10시면 거의 잠자리에 드는 중국에서 형제님들은 12시가 넘어야 자리를 뜨셨다. 어떠한 것이든 형제들 앞에 내어 놓기만 하면 되었다. 빛가운데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마치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말씀과 기도와 계시의 말씀으로 문제를 풀어가셨다.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치료하시는 진료소였다.

 

주께서 나로 형제들의 교통이 어리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참으로 주님의 놀라운 긍휼이고 은혜였다. 나는 소경이었다. 눈은 뜨고 있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나는 백주에도 지팡이를 들고 헤매는 장님이었을 것이다. 장님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을까. 눈을 뜬 자라야 아름다운 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아름다운 것은 주님 한 분이셨다.

 


세상 모든 것은 썩어지고 낡아진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주님의 아들들과 주안에서 하나로 연합될 때, 주님의 거처가운데 같이 할 때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이 우리를 통해 표현되고 나타날 때 아름답다.

 

주님을 찬양한다. 교회를 찬양한다. 주님은 빛이시다. 교회는 우리의 어두움과 문제들을 해결하고 물리치시는 빛이었다. 교회 가운데, 빛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곧 교통이었다. 주님 안으로 들어갈 때 나의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을 알았다. 죄를 드러나게 하며 죄를 내치신다.

 


그간 나는 나의 어떠함을 교통 가운데 내어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 단지 교통 가운데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빛 가운데 있는 것이 중요하였다. 무엇이든 빛 가운데 들어가기만 하면 어두움이 드러났다. 교통가운데 참여만 해도 나와 비슷한 어려움으로 어두움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동시에 내 어두움이 치료되었다.

 


교통은 빛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었다. 중국교회의 교통은 친교모임이 아니었다. 강력한 치료의 빛이 있었다. 형제들의 교통 가운데 나타나는 한마디 한마디는 나의 양심과 폐부를 찌르는 빛이었다. 형제들의 교통은 강한 빛으로 나의 어두움을 찌르는 말씀으로 다가왔다. 내가 부활생명 가운데 산다 하더라도 숨을 곳이 없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4-15)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주의 임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빛 안에 있게 된다. 그런 즉시 우리에게 피가 필요하였다. 성경은 또 교회를 등대라고 말한다(계1:2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자신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많은 형제 자매들의 간증을 들었다. 몸은 교회이고 교회는 등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당연히 모든 것이 감추어지고 숨겨진다. 그러나 등의 빛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들어낸다. 교회는 등대이기 때문에 빛을 가지고 있는 등을 지탱한다. 우리가 빛 안에 있을 때 그 빛은 우리를 드러낸다. 우리가 교회로부터 떨어질 때 우리가 즉시 어둠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은 옳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로 돌아오는 즉시 교통가운데 들어가는 즉시 나의 모든 것이 발가벗은 듯이 드러났다. 교회는 빛나는 등을 지탱하고 있는 등대이기 때문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고 발가벗은 것같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내가 교통가운데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를 빛 비춤으로 무엇이 잘못했다 라고 느끼게 하였다. 빛 비춤이 느껴졌다. 이것이 참된 교통의 의미였다. 일상적인 형제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말의 어느 부분에서 나의 깊은 폐부를 찌르는 것이 있었다. 아는 사람끼리 앉아서 잡담하는 것이 교통이 아니었다. 

 

우리가 주님과 교회, 형제들과의 교통 안에 있을 때 이것이 빛 안에 있는 것이었다. 빛은 교통을 통하여 우리를 빛 비추고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피로 깨끗케 되는 것이 필요하였. 나는 드러남에서 숨을 수 없었다. 교통가운데에서 정결해지고 깨끗해지는 신부의 정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내가 세상 동네(친구들)로 돌아갈 때 내적인 빛이 사라진다는 것을 어느날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주님과의 교통이든 성도들과의 교통이든 어떤 교통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빛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가 필요하였다. 우리가 교통 안에 있다면 동시에 빛 안에 있었다. 우리가 빛 안에 있을 때 우리를 깨끗케 하는 피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 때 피를 적용하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즉시 더러워지고 정죄 안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교통가운데에서 우리의 양심을, 영을 깨끗케 하는 피를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교통은 피를 적용하는 훈련장이고 실제 현장이었다. 형제들간의 교통은 정결케 되고 순전하게 되는 주님의 자녀들로 성장해 가는 양육장소였다.

 

우리 안에 주님의 빛이 비추면 비출수록 우리는 드러났다. 우리 안에 주님이 확장되면 될수록 주님의 아주 작은 세미한 소리도 결코 지나칠 수 없었다. 우리가 주안에서, 교통안에서 살수록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그만 말씀이라도 걸림이 되었다. 

 

그만큼 우리 마음이 예민해졌다. 쉽게 지나치던 말씀 하나가 마음에 걸려 넘어가지 못하는 현상이 자주 벌어졌다. 우리가 곧 주님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빛 아래서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숨을 곳이 없었다. 

 


그것이 율법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고 넘어갔다. 성경말씀 전부가 내 것은 아니었다. 내게 합당한 것은 내 것이었으나 합당치 않은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과 같았다.

 


간음하지 말라하는 율법은 내 죄를 깨닫게 하는 십계명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확장되고 나를 주장하면서부터 그것은 더 이상 나로 죄를 깨닫게 한 십계명의 하나만은 아니다. 내 마음의 법이 되어 나로 그 앞에 멈추게 하였다.

 


주님은 긍휼이 넘치신다. 우리를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지만 곧 바로 피를 적용시키게 함으로 우리를 세우셨다. 율법 앞에 떨림이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 비춤을 받도록 하면서 피를 적용하게 해 주셨다. 빛으로 드러나게 하지만 피로서 정결케 하셨다. 빛 비춤으로 인한 생명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율법을 완전히 이루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곧 구원임을 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산다하면서 마음대로 살수는 없다. 내 마음에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내 마음 안에서 율법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통은 우리를 죄로부터 드러내며 피로서 깨끗케 하여 아름답게 한다. 주여 교통의 즐거움을 알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교통 가운데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는 주님을 보았다.








음식으로 나타나신 주님




중국 교회에서의 생활은 어린아이와 같이 매일 말씀을 먹고 먹는 일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할 일이 먹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지 않은가. 말씀을 먹을수록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성경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먹는 것이었다. 전에 나는 말씀을 읽는다고 생각하였다.중국형제님들이 말씀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생소하게 들렷다.

 

그러나 말씀은 읽는 것이 아니었고 듣는 것도 아니었고 먹는 것이엇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영이요 음식이었다. 우리가 말씀을 음식으로 취하여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우리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먹는 얘기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우리가 애굽에서 탈출한 유월절도 핵심은 양을 잡아먹는 것이었다. 우리가 한 일은 단지 양을 가족대로 잡아 집안에서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들고 급히 먹는 것이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양고기를 먹었다. 우리는 집안에서 양의 고기를 먹었을 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죄를 용서받은 것은 아니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우리는 집안에 있었다. 하나님의 신은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다.

 


사망이 우리의 집을 넘어간 것뿐이었다. 우리는 양고기를 먹은 그 힘으로 사흘 길을 걸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다. 피는 우리에게 보이려고 바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보이려고 흘린 것이다. 그리고 쓴 나물을 먹었다. 쓴 나물과 함께 양고기를 먹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핵심은 먹는 것이다. 전에 탕자의 비유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의 분깃을 가지고 나간 아들이다. 다시 말하여 구원받은 아들,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곧 나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곳으로 가서 방탕하게 써버리고 먹을 것이 없는 탕자는 돼지우리 안의 쥐엄 열매를 탐하는 불쌍한 사람이 된 것이다.

 


어느 날 거지 된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고 기뻐하여 목걸이며 귀걸이를 걸어주며 새 신발을 신기고 새 옷을 가져다 입히며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배가 고픈 그 아들이 필요한 것은 입는 것도 목과 귀에 거는 것도 아닌 먹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것이지 입는 것이 아니다. 현명한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이웃을 청하여 아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시게 한다. 탕자에게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인생의 살고 죽는 것이 모두 먹는 것과 관련된다. 인간의 죄와 고통도 먹는 것과 관련된다. 성경의 핵심도 먹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인간타락의 원인인 죄도 잘못 먹으면서 들어 온 것아닌가.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 사람을 두시고 다 먹으라.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명나무를 먹으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 죄가 들어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명나무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들어 온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너희가 임의로 먹되”가 아니라 “정녕 먹을지니"로  되어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반드시 먹을 것을 요구하셨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마저 먹고 영생할까 하여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짓고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으로 만든 것이다. 주님이 같이 살고자 그의 배필로 지으신 것이 아닌가.

 


주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사람들을 다시 한번 생명나무 앞에 세우고 아담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또 먹으라고 하시는 사건이 터진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다.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생명나무로 오시기 전에 4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생명나무 앞으로 가는 많은 방법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 이번에는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주님이시며 동시에 그분은 먹을 수 있는 말슴이 떡이 된 분이셨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0-56)




주님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다. 어디에 오셨는가? 베들레헴(번역하면 떡집, 떡 동네)에 있는 마구간(벌레나 이성 없는 짐승이 사는) 구유(밥그릇, 떡 그릇)에 오셨다. 우리와 같이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먹으라고 밥그릇에 먹이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다. 내 살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고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가 어떻게 자기 살을 먹이겠다는 것인가 수군거렸다.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온 인류를 다 먹이고도 남을 엄청나게 큰 떡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큰 떡을 사람들이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작은 떡으로 나누어질 필요가 있었다. 즉 작은 떡으로 찢어지고 부서질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의 찢어짐이다.

 


그가 죽으심을 당하실 때 일년에 한번 오직 대제사장만이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내렸다. 생명나무 주위를 지키게 한 화염검이 거두어진 것이다. 누구든 들어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찢어진 작은 떡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주님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찢겨져 죽으시고 부활한 주님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신 성령이다.

 


성령이 어떻게 생겼는가? 요한복음 3장에 주님과 니고데모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자.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고 하셨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성령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마치 바람과 같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5-8) 




성령이 우리가운데 어떻게 오시는가. 요한복음 20장에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다락방 가운데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신 주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숨은 호흡이며 생명있는 사람이 내쉬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즉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리곤 보이지 않으셨다. 어디로 가셨을까. 호흡으로 우리 가운데 들어가셔서 생명으로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 것이다. 성령과 호흡을 표현하는 영문 단어는 또 같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19-22)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난 사흘이 되던 날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은 이들과 함께 동행하며 성경을 들어 주님이 고난 받으시고 돌아가셔야 한다는 말로 증거하여 주셨지만 저들은 그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어 같이 유하기를 강권하여 함께 떡을 나누는 장면이 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가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떡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고 나니 눈이 밝아지고 그가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셨을까? 그 제자들의 안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들이 먹은 떡이 곧 주님이며 영생할 생명의 떡인 것이다. 우리 안에 주님이 거처를 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계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성경은 먹는 얘기이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먹어야 한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다음 날까지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다.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땀 흘려 만든 떡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신 신성한 만나이신 주님을 먹어야 한다.

 


만나 또한 떡이다. 생명나무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신 가나안에 들어가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이신 밀과 보리와 포도와 석류와 무화과와 감람나무이시고 꿀이신 주님을 가꾸고 그 열매를 먹어야 한다. 주님과 함께 누리는 재물 또한 모두 먹는 것들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먹는 얘기들뿐이다. 먹고 누릴 수 있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교회를 보여주신 주님

 

내가 중국 교회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의 생활만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곧 가정생활이고 직장생활이고 교회생활이다. 가정생활 따로 직장생활이 따로가 아니었다. 가정생활이, 직장생활이, 교회생활 전부가 신앙생활이다. 하루 24시간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건 그것이 곧 신앙생활의 연장이고 자체였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교회로부터 출발되는 것이었다. 내가 중국 교회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안 것이었다. 그간 내가 알고 있었던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고 집회하는 물리적인 건물을 말하는 예배당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교회가 무엇인가를 솔직히 몰랐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그런 보이는 장소를 교회라고 생각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몸이었다. 주께서 그분의 생명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신 사람들이 바로 교회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 땅 곧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은 이제 구원받았으니 네 마음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분의 영원 전부터의 계획이었으며 목적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의 목적이신 거룩한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즉 하나님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하나의 돌인 건축재료였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신 것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시고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식양대로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었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주님이 떡으로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온전히 하나가 된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온전한 한몸이 되는 것이었다. 물리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 밀알이 두 개 있다고 하자. 두 밀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두 밀알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반죽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서도 같은 과정이 필요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야 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찢어지고 가루가 되셨다. 한 알의 밀알로 오신 주님이 맷돌에서 부서지고 갈리신 것과 같이 가루가 되셨다. 이번에는 사람이 가루가 되어야 할 차례이다. 이번에는 찟어지고 가루가 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가루로 만드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또는 집회소에서 가루로 잘 게 찟기우고 부서지고 갈리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가루가 되었을 때 주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준비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루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둘을 하나로 온전히 합칠 수 있는 접착제가 필요하다. 밀가루를 하나로 온전히 합칠 수 있는 즉 기름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기름을 성령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주와 우리를 한몸으로 건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성령)을 담는 그릇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사단의 꾀임으로 타락함으로서 더러운 그릇이 되었다. 사단이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 재를 뿌린 것이다.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 그릇을 깨끗이 씻을 필요가 있으셨다. 주께서 이땅에 오셔 33년 반동안 인생으로 사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더러운 그릇을 씻으시기 위한 작업이셨던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가루로 만드신 작업이셨다.

 

결국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구원받은, 깨끗하게 씻어진 그릇 안에 자신을 담고 그리고 가루가 된 밀가루에 기름을 부어 온전히 반죽하여 한 덩어리로 만드는 즉, 하나님과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드시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죄사함 받은 상태는 그릇을 깨끗이 씻어 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영(성령)을 사람이라는 그릇 안에 담는 일이다. 이것이 떡으로 오신 주님의 부활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이 완전히 한 몸이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 것이지만 온전히 한 몸을 이룬 것은 아니다. 부서지고 가루가 된 둘이 한 그릇에 담겨진 상태이다. 다음은 둘을 완전히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기름을 부엇듯이 기름이 부어져야 하며 반죽하여 온전한 한 몸이 되는 과정이 남아있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된 것이다. 법궤는 교회를 상징한다. 법궤는 사람으로 표현되는 조각목으로 궤를 짠후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금으로 안팎을 싼 것이다. 조각목과 나무가  온전히 하나가 된 모양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온전히 연합한 모습이 교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사함 받은 깨끗히게 씻어진 그릇 안에 담긴 성령(부활생명이신 주님)과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 연합된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둘 위에 기름이 부어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이 온전히 한 몸이 된 것이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출 25:8-11)

 

오순절, 제자들 위에 부어진 성령이 다음 단계인 사람과 부활생명이신 주님이 한 몸으로 만드는 기름이다.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내린 성령이 제자들과 주님이 온전히 한 몸으로 연합하게 하여 교회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순절에 내린 성령이 교회로 세워지고 표현되는 여러 모습을 깆록한 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어진 기름으로 주님과 제자들이 온전히 한 몸으로 연합되기 위하여 반죽되는 과정이 바로 사도행전 전체의 고난과 고통가운데에서의 사역의 역사이다.

 

교회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몇 사람이 모여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이 부어진 사람들에게, 먼저는 성전이신 주님의 모습 즉,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그리고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을 약속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세우게 하신 것이었다. 교회는 아무 사람들이나 모여 세우는 곳이 아니었다. 주님으로부터 새생명(부활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 부어진 권능의 성령으로 주님 자신이 직접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곳이며 직접 그 자녀들을 치료하시는 곳이며 주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교회는 주님 자신이며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이해가 되었다. 이것을 내게 보여주신 주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이 땅에 하나님의 참교회가 있는 것인지 그 후 난 주께 여러번 물었다. 그런 참교회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안고 난 이 땅에 돌아왔다.

 

오! 주님 자신이시며 몸이시며 주님의 신부이신 교회여! 이 땅에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 http://www.ilovejesu.net/china/wchina05.htm 에서 퍼옴 )

 
   
 

광고    배너등록    회원가입    로그인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총회주소: 605 Broad Ave, #205, Ridgefield, NJ 07657 전화 (201)941-1050 팩스 (201)941-1840 / Copyright (c) 2005-2019 by agkdced.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