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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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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02 16:43
평양 대부흥: 배경 (21) 동양선교회(聖潔敎) 한국선교
 글쓴이 : admin
조회 : 4,594  
[배경] 동양선교회(聖潔敎) 한국선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에 이어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도 1907년에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동양선교회는 미 북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다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뚜렷한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귀국한 나카다 쥬지(中田重治, 1870-1939)와 무디 성경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일본 선교를 지원한 카우만(Charles E. Cowman, 1867-1924)이 1901년 4월에 도쿄 간다(神田)에 중앙복음 전도관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시작한 그들의 선교사역은 그들 자신도 놀랄 만큼 날마다 신장을 거듭했다. 얼마 후 사사오데츠라브로(1869-1914)와 길보른(E. A. Kilbourne, 1865-1928)이 여기에 합류하고 전도관에서 성서교실과 전도집회를 개최하고 전국을 돌면서 순회전도를 했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동양선교회를 조직하고 동양 각 지역의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저명한 교회사가 도날드 데이튼(Donald W. Dayton)이 그의 오순절의 신학적 뿌리(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는 중생(重生),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聖化), 믿음에 의한 신유(神癒),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사상에 근거한 재림(再臨) 등 사중복음(四重福音, Four-fold Gospel)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르침으로 표방했다. 길보른과 일본 사역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선교사역이 놀랍게 발전함에 따라 1905년 11월 동경에서 동양선교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의 선교사역을 하나의 조직으로 태동시켰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1907년에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의 복음의 접촉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나카다 쥬지는 혼다 요이치(本多庸一)와 함께 일본 복음동맹회(Japan Christian Alliance)의 파송으로 1904년 5월 11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 목포를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울, 송도, 평양, 선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까지 순회하면서 주로 일본병사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여러 곳의 한국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서북지역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영적각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나카다는 살아 움직이는 한국교회의 현장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돌아온 나카다는 수원, 공주,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약 2개월 반의 한국 전도여행을 마치고 7월 말에 제물포를 출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길보른의 장남 E. L. 길보른에 의하면 동경성서학원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정빈(鄭彬)은 나카다의 한국 전도여행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비록 2개월의 짧은 한국 전도여행이지만 이 기간 동안 나카다는 후에 한국선교를 개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동양선교회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한때 연동교회 청년 신자였던 정빈이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시작했다. 정빈은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 3월 동경백목성서학원(東京栢木聖書學院)을 졸업한 후 그 해 5월 2일 카우만, 길보른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해 같은 학교 출신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1907년 5월 30일 한국의 최초 성결교회인 염곡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1908년 이장하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이들과 합류해 이들 세 명은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개척자들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5월 2일 입국한 이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여행하는 동안 부흥운동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며 선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종로 1가인 경성 염곡(鹽谷)에 오륙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세 얻어 임시 전도관을 차린 후 카우만 일행이 2주간 집회를 개최했다. 카우만 일행이 돌아간 후 정빈과 김상준이 5월 30일 이곳에 복음 전도관의 효시“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 전도관”을 설립한 것이다.


정빈과 김상준은 창립집회 때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구도자(求道者)가 5명이나 생겨나 힘을 얻고 일주일에 8번의 집회를 열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907년 6월 한국에서의 이 같은 전도관 성장 소식을 접한 카우만과 길보른 일행은“순복음, 중생, 성결, 신유, 우리 주의 전천년 재림이 그 땅에 두루 전파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들의 확신은 한편으로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인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다른 한편으로 정빈과 김상준을 비롯한 초기 개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힘으로 점점 더 현실 속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길보른의 말을 빌린다면 정빈과 김상준은 특별히“순복음을 자신들의 동족에게 전하려는 분명한 결단”을 가지고 있어“서울에 순복음을 전하는 전도관 설립”의 적격자였다.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 개시는 어떤 다른 교단의 선교회에 비해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했다. 1907년 9월 정빈과 김상준은 동경 동양선교회본부에 다음과 같은 선교 보고를 보냈다:


한 달 동안 우리는 8번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졌고, 4번의 성결집회, 12번의 구령회, 한 번의 특별집회를 가졌다. 주께서는 36명의 영혼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한 달 동안 1,200부의 전도지를 배포했다. 이제 성결을 구하는 3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많은 마귀들이 우리를 대항해 나타나니 저들과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


그로부터 4개월 후 1908년 1월 이들은 지난 한 달간의 선교사역을 보고하면서“우리는 지난달 풍성한 주의 축복을 받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한 달 7번의 야외집회, 9번의 성경공부, 5번의 부흥회, 3번의 주일학교, 12번의 기독교인 집회, 4번의 기도회를 개최하였고, 3,000장 이상의 전도지를 배포하였으며, 16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건강 문제로 정빈이 서울을 떠난 가운데서도 김상준은 적극적인 전도에 힘입어 이웃 사람 7, 8명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지방 전도를 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들렸을 때“거기서 10명이나 되는 영혼을 구주께로 인도하는 특권을 얻었다.”이 같은 헌신적인 전도열에 힘입어 1907년 5월 30일 첫 전도관이 개관된 후 6개월 만에 272명이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비록 이 숫자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경성에서 당시 장감이 얻은 수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교단 배경도 없고 선교사가 상주하는 것도 아닌데도 소수의 한국인 지도자에 의해 한 전도관에서 그 같은 결실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부흥운동의 열기, 카우만과 길보른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김상준, 정빈과 같은 일본백목성서학원(日本柏木聖書學院)에서 훈련받은 이장하의 합류로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08년 여름 이장하는“나는 지금 우리 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내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원은 이 순복음을 여기 있는 나의 모든 형제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는 내용의 선교보고를 보냈다. 당시 김상준, 정빈, 그리고 이장하 세 사람의 사역을 직접 방문하고 목도한 한 외국인은 “이보다 더 좋은 트리오는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1909년 4월 카우만 부인은 일렉트릭 메시지(Electric Messages)에 기고한 “한국사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서 세 사람의 사역과 관련하여 이렇게 보고했다:


좋은 소식들이 퍼지고 있다. 세 형제는 저들 자신의 집회와 반에서 전도하는 일에 바쁠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사경회에 초청 받고 있다. 저들로 인해 생명이 가득한 성령의 지식이 널리 퍼지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하셨다. 최근에 그들은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부터 특별집회를 인도하도록 초청받았다. ……밤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성서의 성결을 전혀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게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 아침과 오후 전도관에서 40-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경회를 열고 있다.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성서학원에 입학 요청을 하고 있으나 현재 우리는 저들을 수용할 만한 기숙사가 없다. 따라서 지금 절박한 사항 중 하나는 1백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가 딸린 적당한 성서학원 건물 하나와 5, 6백 명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큰 선교 강당이다.


카우만 선교사 부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들 세 사람의 헌신적인 협력에 힘입어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선교사의 능력”을 넘어설 만큼 놀랍게 확장되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 특정한 교파의식을 갖지 않고 문자 그대로 노방에서 복음을 전해 구주를 영접하게 한 후 이들을 인근의 기성의 다른 교파 교회로 인도했다. 그러다 노방전도가 비난이 일자 정빈은 카우만의 도움을 얻어 1908년 9월 현 을지로 입구인 동현(銅峴, 구리개)에 염곡보다 더 큰 150석의 중국인 소유 기와집 한 채를 월 20불, 6개월 기한으로 임대하고 오전에는 성서학원을 개교하고 오후에는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그 해 11월 카우만과 길보른이 다시 내한하여 집회를 개최하면서 동양선교회는 날로 성장을 거듭했다. 정빈, 김상준, 이장하는 전도관이 협소하여 고민하던 중 이듬해 1909년 5월에 온 카우만 일행이 다시 경성을 방문하자 이들과 함께 장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장로교인 이씨의 도움으로 무교정에“신 성결장막”이라 부르는 경성중앙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당시 이들이 자리를 잡은 무교정(武橋町)은 모교동(毛橋洞) 또는 모전이라 불리워진 상가 지역으로 여인네들의 머리 장식과 갓을 파는 장사치들로 붐비는 곳으로서 가까이 인접한 다정(茶町)은 경성에서는 기생촌으로 유명한 환락지대였다. 때문에 지극히 세속에 물든 서민들과 민중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배경] 플리머스 형제단, 안식교, 구세군의 한국선교

장로교, 감리교, 동양선교회, 대한기독교 외에도 플리머스 형제단, 러시아 정교회, 안식교,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1896년 12월 플리머스 형제단 노리마츠(乘松雅休, 1863-1921)가 입국해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해 기독동신회를 조직 플리머스 형제단을 한국에 전파했다. 그는 일본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역할을 했던 조합교회 와다세와는 달리 정치적 권력과 무관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이후 정치적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 후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1899 혹은 1900년 한로(韓露) 해빙무드를 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식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손흥조(孫興祚)와 유은현이 하와이 이민 길에 일본에 들렸다가 재림교회 전도사 구니야(國各秀)로부터 침례를 받고 이민을 포기하고 6월에 국내에 들어와 선교했다. 귀국 도중 하와이 개발공사 계몽원 임기반(林基盤)에게 전도하고, 8월 10일과 9월 13일에는 구니야와 일본주재 재림교회 선교사 필드(F. E. Field)를 초청하여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다 1905년 11월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 목사가 내한 1906년 선교본부를 평남 순안에 두고 전도, 교육, 의료, 문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타 개신교단에 비해 안식교는 처음부터 토요 안식일 준수와 재림신앙으로 인해 기성교회, 정부, 일반 사람들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 못했다.


역시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명 여호와의 증인, 만국성경연구회도 1912년 헐리스트 선교사가 내한 서울 계동 147번지에 사무소를 차린 후 하나님의 거문고, 러더보트 저, 박민준(朴旼濬) 역 정부(政府)라는 책자를 발행하면서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들은 한국에 경성우체국 사서함 21호를 개설하여 일본 요코하마 복음인쇄소를 통해 1913년부터 월간 만인보를 발행해 국내에 반포하기 시작했다.


구세군은 1907년 10월 허가트(R. Hoggart)가 내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본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전통을 따라 구세군의 한국선교 역시 이 방면에서 진행되어 초기 한국선교가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해서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북장로교 선교회(PCUSA)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이래 북감리교 선교회, 빅토리아 선교회, 대한기독교, 남장로교 선교회, 남감리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러시아 정교회, 안식교, 동양선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다양한 교파의 선교 활동으로 풍요로워졌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개신교 선교회가 거의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개신교 선교는 1884년 알렌의 입국을 기점으로 1908년까지 거의 완료되었다. 둘째, 장로교는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써 장감 선교회가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복음의 열정이 대단한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 전통에 기초한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은 영미의 청교도 전통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이들이었지만 무디를 비롯한 당시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존중하면서도 구령의 열정이 대단했다. 화란 개혁파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언더우드나 구학파의 전통에 있지만 무디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파송된 맥코믹(McCormick Theo. Seminary) 출신 선교사들은 비록 본국의 교단과 출신학교가 달랐지만 성향이 유사한 점이 많았다.


1893년 남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장로회 정치를 쓰 미슌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한국선교를 추진함으로 한국교회에 복음주의 장로교 신앙을 저변 확대시키는 토대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98년 캐나다 선교부가 조직된 후 이 공의회는 선교사들만 아니라 한국인 총대가 참석하는“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朝鮮耶蘇敎長老會公議會)로 확대 조직되었다. 이 공의회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제도적인 영국 국교회와는 달리 중생과 회심의 체험을 강조한 아펜젤러, 존스, 홀, 리드 등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은 전형적인 요한 웨슬리의 후예들로 구령의 열정과 복음의 열정이 대단했다. 이처럼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은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는 성경의 객관적 권위와 구원의 주관적 체험을 동시에 강조하는 전통적인 웨슬리안들이었고,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도 신학적으로는 구학파 전통에 있으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장감이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민족복음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감을 초월하여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특별히 북미 출신의 선교사들은 당시 영미에서 일고 있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파송된 이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투철했고, 연합활동에 적극적이어서 선교지의 난관들을 극복하고 기대했던 이상의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장감보다는 늦게 한국선교를 개시한 동양선교회나 대한기독교 역시 개인의 중생의 경험과 인격적 신앙고백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초기 한국에 파송된 장감 개신교 선교사들과 맥을 같이했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와 교단은 달랐지만“복음주의 기독교”를 이상적인 모토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 전파는 기대 이상의 결실로 이어져 1897년 현재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늘어났다.

( http://www.1907reviv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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