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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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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02 16:12
평양 대부흥: 배경 (17) 아펜젤러와 스크랜톤 입국
 글쓴이 : admin
조회 : 6,185  

한국감리교 선교의 개척자 아펜젤러
 

[배경] 아펜젤러와 스크랜톤 입국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가장 뛰어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있었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열정,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1912년, 그의 신학교 동료 앤더슨(William F. Anderson)이 말한 대로 “그는 신체적으로는 건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지성적으로는 예리하고 학자적이었으며, 게다가 따뜻한 가슴과 동정심이 어린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피스가 “한국의 복음의 개척자”, “한국인의 사도”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아펜젤러는 혈통적으로는 스위스 혈통을, 신앙적으로는 종교개혁과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 소더톤(Souderton)에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마리아 게르하르트(Gerhart)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메노나이트 출신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줄줄 암송할 만큼 독실한 신앙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받았고, 1872년 11월 12일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피터 피셔(Peter S. Fisher)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개혁파 전통을 준수하는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배경]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준비

그러다 18세 때인 1876년 10월 1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며칠 후인 10월 11일부터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다 대학시절 1879년 4월 21일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온 오랜 심사를 끝내기로” 결심하고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이적했다. 그가 왜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전향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뚜렷한 회심의 체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감리교로 적을 옮긴 이후 아펜젤러는 “훨씬 마음이 안정되고” “실제로, 언제나, 그리고 완전한 감리교인”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준비된 선교사였다. 1882년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랭카스터의 개혁교회가 운영했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졸업한 그는 동부의 명문 드루신학교에 진학해 신학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신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아펜젤러는 1883년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참석해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다짐했고, 그곳에서 장차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젊음을 불태울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만난다.


비렌즈(A. F. Behrends), 뉴톤(Richard Newton), 핫지(A. A. Hodge), 타운센드(L. T. Townsend), 고든(A. J. Gordon) 등 신학과 선교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대거 하트포드 선교 대회의 강사들로 참여했다. 그리피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들은 “모두가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었고 여러 교단들을 대표하는” “영감(靈感)어린 강사진들”이었다. 이미 이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 10월 22일 친구 워즈워드(J. S. Wadsworth)와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선교를 결심했던 차였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전에 없는 선교열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아펜젤러에게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어넣었다. 본래 아펜젤러가 가려던 선교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나 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친구를 대신하여 한국선교를 결심한 것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아펜젤러 부부의 한국행을 축하하는 “대단히 감동적인 파송예배”를 드렸고, 거의 전 신학교 교수와 학생이 역까지 나와 이들의 한국행을 축복해 주었다.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Bishop Fowler)에게 안수 받은 아펜젤러는 그 다음날 3일, 이미 1884년에 미 감리교 선교사 후보생으로 지명된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내외,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2-1929), 그리고 1884년 12월 17일 결혼한 그의 아내, 이렇게 4명과 “아라빅”(S. S. Arabic)호에 몸을 싣고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명문 예일대학과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스크랜톤은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오하이오 주에서 개업하다 아펜젤러보다 앞서 1884년 12월 북감리교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내정을 받고 같이 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언더우드가 혼자 한국을 향해 출발했던 것에 비하면 부부가 함께 출발한 아펜젤러나 스크랜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2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3월 5일,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 “제 1회 한국 선교사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가 열린 야오야마 에이와 학원(英和學院, Anglo Japanese College) 구내에 있는 맥클레이 집에는 맥클레이 부부,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톤 부부, 메리 스크랜톤 등 7명의 선교사와, 박영효와 이수정 2명의 한국인이 참석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시편 121편,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말씀을 통해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감정에 처해 있는 아펜젤러 일행에게 이미 9개월 전, 자신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험했던 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의 경험을 전하며 한국선교를 위한 의지를 다졌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감리교 한국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1885년 3월 31일 미국 감리교 파울러 감독은 한국선교를 준비하며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맥클레이를 한국 선교부 감리사로, 아펜젤러를 부감리사로, 그리고 스크랜톤을 선교부 회계에 각각 임명했다. 제도조직의 순발력에 있어서 장로교보다 한 수 앞선 감리교는 이미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한국 선교부 조직을 완료한 셈이다. 아펜젤러 일행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일행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1885년 3월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 지도자들이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던 기간이었다. 자연히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 일행 중 스크랜톤은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피신해 와 있던 박영효를 만나 그로부터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백성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과 기독교입니다. 선교사들과 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우리 백성을 교육하고 향상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다했습니다. 이 백성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길은 지금 환히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교사들은 우리나라 어느 모퉁이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합헌적인 개혁을 하기 이전에 반드시 우리는 교육과 기독교화를 서둘러야만 하겠습니다.


맥클레이 선교사도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망명해 와 있던 김옥균을 만나 유사한 말을 전해 들었다. 비록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아펜젤러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로부터 한국어도 배웠다. 이처럼 한국선교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한 김옥균과 지금이야말로 교육과 의료사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박영효의 격려, 맥클레이와 다른 선교사들을 통한 일본에서의 준비와 모국 선교부와 교회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지원에 고무되어 처음부터 성공을 예견하고 있었다.



[배경] 아펜젤러의 순교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는 작은 증기선, 쿠마가와 마루(the Kumagawa Maru)를 타고 가다 기소가와(木會川) 호와 충돌하는 바람에 그만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불태웠다. 목포로 향하는 배에는 그의 번역조사 조한규와 아펜젤러가 동행시킨 여학생 한 명, 광산기술자 미국인 보울비(J. F. Bowlby), 그리고 2, 3명의 일본인이 동승하고 있었다.


한밤중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항해하던 배는 마주 오던 배와 충돌하게 되었다. 곧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보울비와 아펜젤러는 갑판으로 올라왔다.“아펜젤러는 매우 흥분하여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배에서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그는 자신의 안전보다도 동행했던 조사와 여학생, 이 두 명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그 현장에서 구출된, 아펜젤러를 지켜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그가 생명을 잃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한국인 비서와 자기 보호 아래 있던 어린 한국 소녀를 불러 깨우기 위해 그들에게로 갔기 때문이었다”라고 전한다. 친구를 살리려다 갑판에 오를 수 있는 황금 같은 1, 2분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복음을 가지고 온 아펜젤러는 마지막 순간까지“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자처럼 당돌하고 여인처럼 우아한가 하면 주님 위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열정의 이 감리교인은 남을 위해 섬기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비록 44세의 일기로, 한국선교 17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동안 그가 이룩한 선교의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1902년 5월, 세상을 떠나기 바로 한 달 전, 아펜젤러는 17년 동안의 한국선교를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에서 첫 세례 받은 사람이 생긴 지 15년이 채 안 되며, 첫 지방회가 조직된 지 12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세 장로사와 세 지방회가 있고 입교인이 1,296명, 학습인이 4,559명이 있으며, 14명의 본처 전도사와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와 교회 경비와 교회 건물들의 경비를 위해 1,600달러의 헌금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라는 말이 눈에 띈다.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으면서 자신에게 공을 돌리지 않는 그의 겸손을 읽을 수 있다.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야말로 한국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나란히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이후 한국선교를 위해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협력 차원을 넘어 자신이 소속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고리 역할을 했다. 죽을 때까지 그들의 협력은 한결같았다. 둘은 교파의 벽을 넘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한국선교를 불태웠던 신학교 시절부터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입항하고 한글 성경을 위해 헌신하다 고귀한 생명을 바친 것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국선교를 같이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톤 가(家)에 이어서 1887년에는 조지 존스(George Heber Jones)가 내한했고, 같은 해 중국에서 사역하던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가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겼으며, 1889년에는 맥길(W. B. McGill), 루이자 룻바이러(Louisa C. Rothweiler), 메타 하워드(Meta Howard) 등이 내한 북감리교 선교회에 합류하면서 선교회가 상당히 보강되었다.


( http://www.1907reviv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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