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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02 16:03
평양 대부흥: 배경 (16) 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의 입국
 글쓴이 : admin
조회 : 6,733  

한국장로교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부부
 

 
[배경] 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의 입국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게 한 지도자”였으며, 스피어(Speer)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펜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더(Scuder) 박사, 테일러(Taylor) 박사와 나란히 조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그의 위대한 열심, 불굴의 에너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초자연적이라는 위대한 신앙과 깊은 확신은 그를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었고, 모든 종류의 선교사역의 출발에 있어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교회사가 라토렛은 언더우드를 이렇게 평했다:


1885년에 두 번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가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선교를 계속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현명한 선교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자, 성경 번역자, 그리고 다른 기독교문서, 사전 편집자, 복음 전도자, 조직가, 그리고 국왕의 비공식적 고문관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구태여 라토렛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더우드만큼 추진력과 친화력과 주님을 향한 놀라운 비전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바울의 심장에서 박동치고 있던 복음의 빚진 자의 소명의식이 강하게 불타고 있었다. 본래 인도선교를 지망하던 그를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보내신 것은 이 나라를 복음화하시기 위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이었다.



[배경] 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 배경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 번 쓰면 변조할 수 없는 안전수표책, 75번이나 쓸 수 있는 먹지,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개량품을 착안해 낸 발명가였고, 어머니는 런던 선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 감리교의 연합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웰즈가 교회 담임목사 알렉산더 와우(Alexander Waugh) 박사의 손녀였다. 이 외증조 할아버지와 언더우드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었다. 특히 “관대한 마음의 씀씀이, 넓은 박애심,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은 상당히 닮은 점이 많았다.


비록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다. 특히 언더우드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아버지의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1914년 한 보고서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재림신앙이 강하게 담겨진 190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게일과 함께 번역을 완료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고,”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에게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재림에 대한 희망이 한국에서 그대로 전이되어 한국교회가 재림의 신앙을 굳게 다지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재혼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불로뉴 슈메르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이 두 소년의 신앙은 이곳에서부터 남다른 면이 나타났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비록 가톨릭학교라고는 하지만, 당시 불란서는 1789년 불란서 혁명 이후 급속히 진행된 기독교 후시대(Post Christianity Age)의 세속화 물결이 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해 반종교적인 현상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이 남자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영국에서 유학 온 두 형제가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자 조소를 보낸 것이다.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영국 소년들이 합류하자 프랑스 소년들도 다음날 아침 영국인들로부터 매를 맞거나 역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례한 행동을 자제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언더우드 형제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5달러를 주고 물건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가게로 가면서 돈을 조금씩 찢다 가게에 도착할 즈음에는 5달러짜리 지폐가 다 찢겨 나가고 말았다. 어떤 생각에 몰입하다 자신이 물건을 사러 간다는 사실을 잊고 만 것이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렵고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언더우드가 선교지 한국에 와서 착수한 성경 번역 사업과 문서 선교와 연합사업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상임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해 성경 번역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성경 번역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1910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내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후에도 개정 작업에 몰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고 1916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다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대학교 재학 동안] 苦學하였고, 下學 後에는 그 父親을 도와 文房具工場에서 일도 했다. 이렇게 苦學하면서도 宗敎事業에 着念하여 酒肆遊廓으로 다니며 傳道하였고 어떤 때는 구세군을 協助하여 傳道에 努力했다. 이처럼 學資에도 困難하고 宗敎活動에도 時間을 많이 썼지마는 學業의 成績이 優秀하여 卒業時에는 卒業班 代表로 告別演說을 했다. 學業이 이렇게 優秀한 同時에 人格이 卓越하여 그 同[年]輩 中에서는 鷄群獨鶴의 風采로 指導에 當하였었다.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 언더우드는 1881년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신학교에 입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말씀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다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다. 언더우드가 졸업한 화란개혁신학교의 메이번(Mabone) 박사는 언더우드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배경]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준비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의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1883년 겨울,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가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였다.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한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에 대한 윌리엄 그리피스의 도전이었다. 1882년,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윅신학교 10년 선배 그리피스는 그 유명한 조선: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를 출판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과 예리한 필치가 조화를 이룬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한국에 관한 가장 무게 있는 서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고, 달레의 한국교회사나 로스의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와 더불어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는 물론 한국의 대 외국교류관계, 그리고 선교전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도 국제 정세와 선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술했다. 당시 세계무대의 뒤 안에 가리어져 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올린 작품이었다. 뉴 브룬스윅신학교를 1872년에 졸업하고 세계 선교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선배 그리피스의 활동은 언더우드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선(A. T. Pierson)의 강연은 언더우드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 뉴브룬스윅에서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점점 더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터였기 때문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1883년 언더우드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에 참석해 많은 감명과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서의 꿈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그곳에서 한국감리교 선교의 개척자 아펜젤러를 만나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한국선교의 꿈을 더욱 다졌다. 그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위해 뜻을 모았던 절실한 동료요 친구요 동반자가 되었다. 훗날 한국선교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놀라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도선교를 준비하던 언더우드의 마음과 환경을 움직이셔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극적으로 돌리셨다. 언더우드는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 때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882년과 1883년에 걸치는 겨울, 지금은 동경의 명치학원에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올트먼스 목사가 뉴 브룬스윅 선교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한 보고서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조약에 의해 서양 세계에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은둔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천이백만 내지 천삼백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교회가 문호개방을 위해 기도했고, 결국 1882년 슈펠트 제독을 통해 맺은 조약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활동도 없이 일년여를 보냈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 하에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1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온 터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 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1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 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인도가 나의 선교 소명으로 알고 인도를 위해 각별히 준비해 오던 일들이 떠올라 제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는 개혁교회 선교부에 [한국 파송을] 두 차례나 신청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며 나의 청원을 거절했습니다. 또 장로교에도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 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교회의 요청을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언더우드는 개혁교회(RCA)에 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신청했는데도 거절당한 것이다. 당시 그가 속한 개혁교회는 일본에 베어벡(Verbeck), 브라운(Brown), 발래(Ballagh), 윅코프(Wyckoff), 스튜트(Stout), 부츠(Booth), 피키(Peeke), 키더(Miss Kidder) 양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파송했고, 이미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선교회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까지 선교를 확장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가 북장로교로 적을 옮겨 한국행을 타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뉴욕에 있는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 청빙을 수락하는 서류를 발송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다시 한 번 뉴욕의 센터 스트리트 23번지에 위치한 북장로교 선교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 동안에 예기치 않은 변화가 발생해 있었다. 언더우드를 본 엘린우드 박사는 전에 없이 반가워했고 언더우드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언더우드는 선교부 다음 회의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언더우드의 한국선교의 오랜 염원은 그의 인내와 노력을 통해 현실로 이루질 수 있었다. 결국 “1884년 7월 28일 이 교육받은 복음 전도자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1884년 봄,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로부터 문학 석사를 받았고, 그 해 11월에는 뉴 브룬스윅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도 받았다. 한국 파송을 앞두고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 총무직을 맡고 있는 삼촌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목사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삼촌은 우리도 한국에 거의 20년 전에 한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전후 문맥상 삼촌이 말한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였음이 분명했다.



[배경] 언더우드의 입국과 활동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여기서 언더우드는 하나같이 한국선교를 염원하고 후원하던 헵번(J. C. Hepburn)을 비롯, 그곳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얼마 후 이수정을 만나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들고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가 탄 배에는 아펜젤러도 타고 있었으나, 아펜젤러는 아내가 임신 중에 있었기 때문에 입국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미국 공관 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주일 후 아내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의 말한 바, “이 땅에 상주한 첫 안수 받은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4월 7일 서울에 도착해 4월 10일부터 광혜원에 “약제사”로 들어가 의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번역과 사전편찬을 착수했다.


처음에 수술을 집도하는 알렌을 도우려고 했으나 피를 보고 두 번이나 기절해 할 수 없이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동시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학교(John D. Wells School)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입법의원 원장을 지낸 김규식이 부모를 잃고 가난에 굶주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를 만난 것이 바로 경신학교에서였다. 너무 굶주려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려는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가 양육하며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학교사업 외에 1887년에는 성서번역을 추진하기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1890년에는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했다. 성서번역은 언더우드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특히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노력은 대단했다.


언더우드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세례를 베푼 인물이며, 남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회의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 준 인물이며, 연합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가 지적한 것처럼, 입국한 지 불과 수년 만에 언더우드는 2권의 저술을 준비하였으며, 찬양집 번역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전도지와 간추린 기독교 교리를 저술하고 있었으며, 소요리문답 번역도 진행하고 있었다. 1890년 아내가 출산 후 건강이 좋지 않아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집회를 인도하며 한국선교를 촉구하였고, 1892년 돌아와서는 전도, 교육, 문서사업에 전념하여 1900년에는 신약을 완간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고, 그 해 YMCA를 조직하여 190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장으로 시무했다.


한국교회가 선교희년을 맞는 1934년 마포삼열 선교사는 언더우드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윌리엄 캐리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며 이렇게 평했다:


한글 성경 번역에 있어서나 일본어 교재의 준비와 인쇄에 있어서나 맥코믹신학교와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와 도전에 있어서나, 미국 선교부와 교회에 대한 호소에 있어서든지,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촉구하는 일이라면 항상 선두에 서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윌리암 캐리의 신앙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의 음성을 들은 이들은 누구나 심금을 울리는 그의 호소력 있는 도전을 잊지 못할 것이고, 말씀을 전하거나 그가 낙관적인 보고를 할 때나 아니면 발전계획을 옹호할 때 열정적으로 전신으로 호소하는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과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맥코믹신학교 출신 그레이험 리(Graham Lee), 스왈른(Swallen), 무어(Moore), 그리고 테이트(Tate),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출신 레이놀즈(Reynolds)와 전킨(Junkin),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밀러(F. S. Miller),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 에비슨(O. R. Avison)을 한국 선교사로 확보한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를 개시하도록 한 것도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 외에 누가 존 로스 신약성경을 전해 받은 한국인들을 찾기 위해 그렇게 깊숙한 강계까지 실제로 위험한 여행을 하겠는가?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교육가로서”, “성경 번역자로서”, “편집가로서”, “여행가로서”, “정치가로서”, 그리고 “평화의 사도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처럼 언더우드 역시 전형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이 평소에 외친 대로 기독교 역사 속에 당신의 교회를 위해 일해 오신 하나님이 변함없이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시고,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신뢰한 가운데 “신쟈의 본분과  일”을 온전히 감당하고, “하님의 놉히 부르시 상을” 얻기 위해 “과 성품과 과 힘을 다야 하님을 랑”하는 가운데 “후세샹”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뎌를 아 즁에셔 자라” 간 하나의 참된 모델이었다. 교회사가라면, 아니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본 이들이라면 한국선교의 계획 이면에 언더우드의 신앙과 이상과 아이디어가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를 깊이 인식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 양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그는 복음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생애에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화란개혁교회(RCA) 교단과 뉴 브룬스윅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19세기 부흥운동의 전통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배경] 언더우드 뒤를 이어 입국한 북장로교 개척 선교사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6월 20일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던 스크랜톤 어머니, 스크랜톤 아내,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하고 이어 훈련된 간호사 앤니 앨러스(Annie Ellers)와 후에 언더우드의 아내가 된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Lillias Horton)이 입국해 한국의 의료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론은 14살 때 부친을 따라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로 이주해 메리빌(Maryville)대학과 테네시대학교(University of Tennesse)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high honors)으로 졸업했다. 그는 교수 요원으로 남아 달라는 테네시 의과대학의 요청을 뒤로 한 채 1885년 6월에 입국하여 그 달 21일에 제중원 의사로 임명받았고, 1887년 9월 알렌이 선교사직을 사임한 뒤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사무엘 마펫이 “이상적인 의료 선교사”, “신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던 헤론은 언더우드와 스크랜톤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에도 임명되었던 “가장 성공적인 의사 및 외과의사일 뿐만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깊은 책임 의식을 갖고 있었다.” 1897년 12월, 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 헤론의 사랑하는 동료,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는 헤론이 어느 누구보다도 맡겨진 의료 선교사역에 충실했던 양식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왕으로부터 가난한 옹기장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인은 숙련된 그의 손길을 통해 육체적인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외과의사였던 그가 휘두르는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였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그의 헌신적인 치료와 정성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치료가 단순히 숙련된 의술을 통한 치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겸손히 쓰임 받겠다는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형제, 그것은 바로 헤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가난한 민중에서부터 여러 공관들과 왕의 충실한 시의(侍醫)였던 북장로교 선교사 헤론(J. W. Heron)은 5년 만인 1890년 7월 26일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하다가 자신의 건강을 잃고 말았다. 하루 이틀을 병석에 누워 있다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해졌다. 둘러앉은 한국인과 여러 동료 선교사들에게 그는 희미한 의식을 가다듬으며 “예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가 함께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의 시신을 묻을 만한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서울 가까이의 양화진에 매장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언더우드와 헤론의 조사들이 거주하는 선교회 소속 집 뒤뜰에 임시 매장하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제물포에 외국인 묘지가 있었으나 한 여름 3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까지 시체를 옮겨 매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그의 유해는 미국 공관 안에 임시 매장되었다 다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장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헤론을 잃은 것은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전후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신학 교육을 받은 길모어(G. W. Gilmore, 1886), 기포드(D. L. Gifford, 1888), 헤이든(M. E. Hayden, 1888), 사이드보텀(R. H. Sidebotham, 1809), 사무엘 마펫(S. A. Moffett, 1890), 베어드(A. L. Baird, 1891), 베어드(W. M. Baird, 1891), 스왈른(W. Swallen, 1892), 그레이험 리(Graham Lee, 1892)가 입국해 복음 전도가 활기를 띰으로써 북장로교 선교회는 여전히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선교단체가 되었다.


( http://www.1907reviv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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