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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3-26 07:55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1] 전쟁 배후 조종한 스탈린
 글쓴이 : admin
조회 : 3,159  

▲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이선근 국방부 정훈국장이 평양에서 수집한 사진 자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1] 전쟁 배후 조종한 스탈린

강규형 명지대 교수·역사학

北 휴전요청에 "잃을 건 사람 목숨뿐… 계속 싸워라" 압박
유럽서 美군사행동 우려 "한반도에 미군 묶어놔야"… 스탈린 사망後에야 휴전
美 방위선서 南 빠지자 1950년 1월 남침 승인… 소련 전쟁영웅 北 보내 전쟁 계획 함께 점검도
6·25 전쟁은 남·북한 외에도 소련·중국·미국 등이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이들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의 주요 국면들을 주도하고 성패를 좌우했다. 소련의 스탈린, 미국의 트루먼·맥아더, 중국 모택동, 북한 김일성·박헌영, 남한의 이승만 등 6·25 전쟁을 수행한 핵심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6·25 전쟁의 전개 과정과 특성을 전문가들이 2010년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전선이 교착되고 6·25전쟁의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8월 20일 김일성은 주은래를 통해 스탈린에게 빨리 휴전할 것을 요청했다. 1995년 공개된 스탈린과 주은래의 비밀 회담 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북한의 요청을 거절하고 미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지시했다. 주은래는 "북한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믿고 있다"며 "(북한은) 송환되는 포로보다 더 많은 인적 손실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은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casualties) 외에는 잃은 것이 없다. 인내를 가지고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이 휴전하자는 김일성의 간청을 거절한 것은 미국이 한반도에 묶여 있어야 당시 소련의 군사 점령 아래서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던 동유럽에서 군사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참전으로 인해 경제적 자원이 고갈되고, 미국이 유럽에 더 신경을 써줄 것을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동맹국들과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소련에 유리하다고 보았다. 결국 6·25전쟁의 휴전은 이를 완강히 가로막던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에야 가능해졌다.

스탈린은 이처럼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한반도에서 불필요한 무력 분쟁을 강요한 장본인이었다. 김일성의 남침 전쟁을 승인해 전쟁을 일으키도록 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찾은 북한 수상 김일성과 외무장관 박헌영에게 물었다. "해방전쟁의 모든 득(得)과 실(失)을 다시 한번 따져보시오. 무엇보다 미국이 개입할 것 같소?"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강력히 부인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남침을 최종 승인했고, 무기 및 군수 물자를 공급해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 참전으로 소련이 전쟁에 말려들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그는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김일성의 남침은 스탈린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탈린은 초기에는 김일성의 남침 제안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1949년 3월 김일성이 처음 남침을 제안하자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고 미국이 개입 안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남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반대했다. 스탈린은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직후인 1949년 8월 김일성이 다시 남한에 대한 공격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거절했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이 최종 승리를 거두고 필요시에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게 되자 스탈린의 태도가 달라졌다. 또 미국에 심어놓은 고위급 스파이(도널드 매클린)를 통해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이 소극적으로 전환된 것을 간파했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연설을 통해 새로운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나는 당신을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알렸다.

스탈린과 김일성·박헌영 회담 후 북한의 전쟁 계획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급파된 2차 세계대전 때 독소(獨蘇)전쟁의 영웅 바실리예프 장군은 북한군 수뇌부와 전쟁 계획을 함께 점검했다. 남침 날짜가 다가오면서 미국이 개입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던 스탈린은 6월 20일 북한군이 소련 군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면서도 그 배에 소련 군인은 승선하지 못하게 했다.

당초 북한군은 총공세를 시작하기 전 전초전으로 옹진반도에서 국지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6월 21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긴급 메시지를 받았다. 북한 정보국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남한이 북한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하고 옹진 쪽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전선에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는 제안이었다. 스탈린은 이에 동의했고, 6월 25일 새벽 침공이 시작됐다.

마지막 순간에 전면 남침으로 작전 계획이 변경된 것은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던 국경에서 갑자기 대량의 탱크로 밀어붙이는 공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 결과 미국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해 재빠르게 15개국이 참여한 동맹을 결성했고, UN의 깃발 아래 싸우게 됐다.

현재까지 구(舊)공산권측에서 얻은 증거로 볼 때 6·25는 김일성이 창안했고, 스탈린과 모택동의 승인 아래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동안 수정주의 학자들이 6·25의 발발원인을 자연 발생적인 내전(內戰)으로 해석한 것이 한국에서는 한동안 정설처럼 여겨졌다. 냉전 해체 이후 비밀 해제되고 공개된 소련 문서들은 이런 주장들의 오류를 밝혀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런데도 한국의 일부 학자들과 금성출판사를 비롯한 일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이미 폐기된 커밍스류(流)의 수정주의적 연구를 아직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역전된 전황은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중·소와 북한의 국경지대까지 밀린 김일성은 1950년 10월 1일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직접 개입 불가라는 최초의 방침을 고수했다. 스탈린은 그 대신 김일성에게 중국이 지원군을 보내라는 자신의 요구를 중국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뜻밖에 모택동은 10월 12일 스탈린에게 중국은 북한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알려왔다. 미국과의 군사적 직접 충돌을 피하려 했던 스탈린은 측근에게 "내버려둬. 미국이 우리의 이웃이 되게 놔둬!"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경악하는 김일성에게 즉각 한반도를 포기하고 북한의 남은 군대를 만주 등으로 철수시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 날 모택동은 마음을 바꿔 북한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스탈린은 즉각 김일성에게 "중국 군대에 필요한 장비는 소련이 제공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스탈린은 전쟁기간 동안 약 7만명에 이르는 공군 조종사와 기술 인력 등을 제공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군사적 존재가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이들의 역할을 극도로 제한했다. 하지만 그는 북한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한민족의 고통은 더욱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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