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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3-12 12:05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 [5·끝] 강제 조약 맺은 조선통감 관저, 공원으로 변해
 글쓴이 : admin
조회 : 3,105  

(1) ▲ ‘한·일 병합 조약’을 처리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창덕궁 흥복헌.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복원했다. /채승우 기자
(2) ▲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조선통감 관저 터. 왼쪽 은행나무 뒤쪽 오른편의 공원 지역에 있던 통감 관저에서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韓·日 강제병합…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마지막 어전회의' 열린 곳은 창덕궁 구석의 작은 방
러시아의 만주 이권 지지해 日, 한국병합 승인 얻어내…
어떤 열강도 이의제기 안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남산쪽 서울소방방재센터 방향으로 10분쯤 걷다 보면 서울유스호스텔(옛 안기부 본관) 진입로가 나온다. 완만한 언덕길을 다시 20여m 오르면 왼쪽에 400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오른쪽 뒤편으로 나무와 벤치, 잔디밭이 있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일제의 조선통감 관저가 있던 자리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통감관저로 불러 '일·한 병합조약'을 체결하고 1주일 후인 29일 이를 공포했다. 을사늑약(1905년)의 현장인 서울 정동 덕수궁 중명전이 사적(124호)으로 지정되고 국치(國恥) 100년을 맞는 오는 29일 일반에 공개되는 반면, 정작 병합늑약의 현장인 이곳은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강제병합 후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가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보고한 '한국병합시말(韓國倂合始末)'에 따르면 데라우치는 8월 16일 이완용에게 "두 나라를 합쳐 하나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이완용은 "한국민의 감정을 고려하여 국호는 '한국(韓國)'을 존속시키고, 황제의 칭호는 왕으로 하여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왕조 수준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데라우치는 18일 이완용에게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고친다' '황제를 이왕전하(李王殿下)로 칭한다'는 것을 본국으로부터 통지받았다며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이상 한국은 조약체결에 착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후 22일까지 대한제국의 고관들이 통감관저를 들락거렸고, 한·일 병합조약은 일제의 뜻대로 진행됐다.

한·일 병합조약을 처리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는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에서 열렸다. 오후 1시 일제와 사전조율을 끝낸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 이병무, 황실대표 이희,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입궐했다. 오후 2시 순종 황제는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과 함께 흥복헌에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순종은 데라우치의 각본대로 이완용을 전권대신에 임명했다.

창덕궁 흥복헌은 궁궐 문 4개를 지나서야 나타나는 구중궁궐 속에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進善門)과 인정문(仁政門)을 지나 선평문(宣平門)으로 들어서면 왕비 처소인 대조전이 나타난다. 흥복헌은 대조전에 이어진 정면 3칸의 작은 부속 건물이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폐위된 고종에 이어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이해 11월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왕비 처소에서 지냈다. 1926년 4월 순종이 숨을 거둔 곳도 흥복헌이었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흥복헌 내부에 허가를 얻어 들어갔다.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은 대여섯 걸음 걸으면 끝이 닿는 작은 방이었다. 현재 건물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재건했다. 윤숙 창덕궁관리소 해설팀장은 "매년 30만명 이상의 일본인 관광객이 창덕궁을 찾지만 이곳이 병합조약을 결정한 어전회의가 열린 곳이라고 설명하지는 않는다"면서 "어전회의가 열렸다고 하면 마치 정당한 절차를 거쳐 병합이 이뤄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어전회의와 병합조약 체결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일본은 이미 1909년 7월 6일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한다"는 내용의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내각 각의에서 최종 결정했다. 주변 열강들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도 진행됐다. 일본은 1910년 5월 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를 통해 한국병합 방침을 영국에 알렸다.

일본으로서는 러시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일본이 자국의 동아시아 영토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1909년 중반 미국과의 제휴를 적극 검토하고 있었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는 만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미국에 동청철도를 매각하여 두 나라의 연결 고리로 삼으려 했다. 그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코코프초프와 회담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제휴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러시아에 제2차 러·일협약을 제안했다. 1910년 7월 4일 맺은 제2차 러·일협약은 만주에서 양국의 특수 지위를 상호 승인하고 서로의 이익을 방위하는 공동조치를 함께 강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남북으로 나누어 이권을 서로 지지하고,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 지역에서 특수이익을 존중하며,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자유행동을 인정했다는 1907년 제1차 러일협약보다 더 진전된 것이었다.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제2차 러·일협약은 일본의 한국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을 전제로 만주문제를 합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열강을 자기편으로 만든 일본은 1910년 8월 21일 영국과 러시아에 한국병합 조약 체결을 미리 통지하고, 한국과 조약을 체결한 프랑스·독일·미국·벨기에·네덜란드 등에 주재하는 일본 대사 및 공사에게 한·일병합을 해당국 정부에 알리도록 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한국 합병은 원래 예기하고 있던 것"이라고 했고, 독일 외무대신 키데를렌 베히터는 "진작 예견하던 일로 놀랄 일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식민지 백성이 될 한국인들은 망국(亡國)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병합늑약 체결 이후 "엄중한 보도관제로 신문기자도 아는 자가 없었다"('한국병합시말'). 한·일 강제병합은 8월 26일 야마가타 부통감의 기자회견에서 처음 알려졌다. 8월 29일 병합늑약 공포 후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만 붙어 있어도 일본 헌병과 순사가 심문하는 분위기에서 한국인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24822&menuId=103601&listType=2&from=&to=&curPage=1&logId=4912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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