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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05 20:14
왕국의 신비
 글쓴이 : admin
조회 : 2,250  
다까바시마오 저, 한영철 역

1.이스라엘 왕정은 언제 왜 시작됐는가
2.다윗은 어떤 사료로 확인되었는가
3.다윗은 유다 부족 출신인가
4.다윗은 어떻게 왕이 됐는가
5.다윗의 조카
6.예루살렘의 노래
7.예루살렘은 언제 성도가 되었는가
8.<예루살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9.<슬픔의 성벽>은 왜 불굴의 재생을 나타내는가
10.왕의 계승 문제와 솔로몬의 즉위
11.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한 목적은 무엇인가
12.게젤의 촌읍에서 출토된 가나안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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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왕정은 언제 왜 시작됐는가

판관기에 등장하는 판관 = 영웅들은 이스라엘을 습격하는 이민족, 블레셋인을 대적해서 타격을 주고 동포 이스라엘을 그 위기에서 구출하는 용사들이며 동포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만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판관 시대의 영웅들은 족장이나 왕인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군상과 공통점은 있으나 판관시대의 영웅들은 하나님 야훼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 동포 이스라엘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 제 부족과의 사이에 그 정치 조직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즉 에돔, 모압, 암몬은 군주 체제이고, 예루살렘,게젤,므기또, 다아낙,벳스안은 자기들의 왕을 세운 도시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이스라엘은 허술한 부족 연합체였다. 거듭되는 불렛셋인 내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예언자 사무엘에게 지도자 왕을 요구했다.
사무엘상 8장은 민족 투쟁 중에서 이스라엘의 장로가 이스라엘을 강대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왕정을 선택한 것을 말하고 있다.
왕국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은 사료적으로는 신사료층(BC 7세기말-6세기)에 속하는데, 이런 생각의 중심은 상당히 오랜 시대로 소급되는 것 같다. 사무엘의 말(8장11-18절)중에 이스라엘을 둘러싼 왕제의 특징이 제시돼 있고 그것은 바로 아시아적 전제 군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 후반에 활약한 최후의 판관이고 최초의 예언자인 사무엘은 백성의 찬성을 얻어 베냐민 부족 출신의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카리스마적 지도자 왕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왕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카리스마를 받아 왕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왕국은 판관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출발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면 하나님의 카리스마와 함께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이 두가지 조건은 초기 이스라엘 왕국의 두 가지 특징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BC 1020년경-1000년경)의 치세는 사무엘기상 9장-31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무력하고 그 지배권은 이스라엘에 한정되고 외적의 침략에 대해서는 제 부족의 소집 군대를 가지고 싸웠다.
판관시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모습을 탈피하지 못한 사울 왕은 무장 다윗과의 비극적인 분쟁 후에 블렛셋인과의 전투에 패하고 에스들렌론 평야의 동남부에 있는 석회암 구릉지대의 봉우리 길보아산(높이 497미터) 에서 제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사무엘상 28장 4절 이하,동 31장1-6절,동하 1장6010절).사울 시대는 카리스마에서 왕정으로 과도기, 즉 종교적인 세계에서 세속적인 세계로의 이행기였다.


2. 다윗은 어떤 사료로 확인되었는가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의 치적을 조사할 때,특히 다윗 왕의 치적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사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고대 오리엔트,특히 슈메르, 바빌론 이집트, 힛타이트 등의 왕들의 치적을 조사하는데는 그 나라들의 왕들이 스스로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서 새겨놓은 비문이나 서판 등을 이용할 수 있으나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그 시대의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기원전 9세기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예후(BC 842S년경-815년경)나 기원전 8세기의 북왕국 왕 므나헴(BC 745년경-736년경)의 치적에 관해서는 동시대의 앗시리아 측의 기록에 약간 언급되어 있으나, 여기서 말하려는 다윗(BC 1000년경-960년경)시대의 일에 관해서는 동시대의 외국 기록에는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다윗 시대에 가장 가까운 문헌 사료는 구약성서 뿐이다. 그중에서 다윗 왕의 치적에 관해서 언급한 부분은 사무엘상 16장 이하 열왕기의 첫 2장까지에 있다. 그리고 사울에 관해서는 사무엘상9장-31장 솔로몬에 관해서는 사무엘하 12장 이하 열왕기상 11장까지에 있다.
사무엘기는 이스라엘 왕국의 기원과 초대 왕 사울과 다윗을 취급하고 있으며,그 대부분은 사무엘의 사후의 사건들이다. 그 내용을 사료 비판에 관계없이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사무엘(상1장-7장),사무엘과 사울(8장-15장),사울과 다윗(16장-31),다윗과 그 왕국(하1장-8장),다윗 왕위 계승사(9장-20장),부록(21장-24장)
사무엘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내용의 중복과 모순,그리고 서로 다른 기록이 있고, 구약성서의 다른 문서와 마찬가지로 전승의 다양성이 보인다. 가령 왕국의 성립에 관해서 왕국에 호의적인 입장에 선 기록(상9장,10장1절-16절)과 비판적인 입장에 선 기록(상8장,10장17-24절)의 대립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기를 일관된 한 권의 책으로 보기가 어렵다.
많은 연구자의 분석 결과 사무엘기는 기록된 사건에 시간적으로 가까운 사료층과 뒤에 기록된 사료층,즉 신구 두가지 사료층을 골간으로 해서 편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두 가지 사료층은 구사료층과 신사료층,또는 조기 사료층(BC 10세기)과 후기 사료층(BC 7세기말-6세기)이라고 가칭된다.

각기의 특징을 들면, 구사료층은 사울과 다윗이 주인공이고, 그 특징은 소박하고 신학적인 수식이 적은 것이다. 이에 반해서 신사료층은 사울이 주인공이며 그 특징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신학적이며 야훼 신권주의로 일관되어 있다.
신사료층의 성립 연대는 유다왕국 말기에서 바빌로니아 포로기(BC 6세기)에 걸친 시대로 보기 때문에 구사료층이 다윗에 관한 기본 사료가 된다.


3. 다윗은 유다 부족 출신인가

헤브라이어의 <다윗>이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의 모음을 바꾸어 <돗>으로 고치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며, 1935년에서 38년에 걸쳐서 프랑스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유프라테스강 하류 우측 강안의 고도 마리(현재 이름 텔.할리)의 발굴 조사가 진전되고 거기서 발견된(마리 왕실 문서)(BC 18세기)에 보이는 <다위돔><사령관><장군>의 뜻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있다.
다윗의 계보는 기원전 350년경에서 기원전 250년경 사이에 편찬된 역대기 상 2장에 유다의 자손의 계보로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사료 비판에 관계없이 도표화하면 별표와 같다.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유다 부족의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며 부친 이새는 아마 판관 시대에 모압 여자 룻과결혼한 보아스의 손자가 되므로 다윗은 모압의 혈통을 받은 것이 된다. 그런데, 성서사전이나 다른 많은 책에는 다윗은 유다 부족 출신이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다윗은 유다 부족 출신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아니고, 가령 미국의 J.브라이트는 그의 저서<이스라엘사>(1972)에서 다윗을<베들레헴의 젊은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기록(사무엘기상 16장18절,동상 17장12절 동상 20장 6절,동상 23장 23절, 판관기 17장7절,역대기상2장 등)을 자세히 검토하면 우리는 다윗이 유다 부족의 출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BC1020-1000년경)이 베냐민 부족의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난 귀족 가문의 출신이었다(사무엘상 9장1-2절)고 추정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필자는 다윗은 기원전 2천년대 중엽 이후에 고대오리엔트 전역에 나타난 하피르 또는 아피르라고 불리는 집단과 성격적으로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이브리>(<헤브라이인>을 가리키고 구약서에는 34회 사용되고 있으며 노예인 경우도 있고 용병인 경우도 있다)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하피르라고 불리는 집단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시리아 ,아나토리아 방면에서 출토된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점토판 속에서 보이며 종족 이름이라기보다는 정주 사회밖에 있으면서 비옥한 땅 주변에 출몰한 사회층의 이름이라고 해석된다.


4. 다윗은 어떻게 왕이 됐는가

다윗의 출생에 관해서는 구약성서의 기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자세하지 않다.
서로 모순되는 기록에 의하면,다윗은 어려서부터 유다의 구릉지대에서 부친의 양치기를 도왔다. 그는 수금을 잘 타고 점점 사람들의 중망을 모았고, 그것이 결국 사울 왕의 귀에도 들려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하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사울왕의 병을 수금으로 고치기 위하여 궁정으로 들어가게 했다(사무엘상 16장 구사료층).
한편 다윗은 블레셋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고 사울왕에게 중용된다(사무엘상 17장구사료층) 다윗은 사울 왕에게 용병으로 고용되고 대장이 된다. 그러나 다윗의 명성과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군인 다윗은 점차 사울 왕의 질투를 사게되고 사울 왕ㅇ에게 내쫓겨 방랑군인이 된 뒤 블레셋 사람 땅에 있는 갓 촌읍의 아기스왕에게 몸을 의탁하여 시글락 촌읍을 받아 블레셋군의 장교로서 블레셋 왕에게 충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남방의 여러 부족을 약탈자들로부터 지켜주고 북방의 이스라엘 주변의 제 부족을 공략하여 그 전리품의 일부를 남쪽 유다의 장로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신뢰를 얻어 후일에 대비했다.
이 사이에 북방에서는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에게 격파되어 결국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이 전사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애도의 노래를 지었다(구사료층,64항 참조). 사무엘하 1장 17-27절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조가>는 아브넬에 대한 다윗의 조가(사무엘하 3장 33-34절)와 함께 다윗이 친히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이 조가들은 판관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 이어 고대 헤브라이 시가의 걸작이다.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인데, 18절에 의하면 후일에 이스라엘의 영웅의 공적을 주제로 한 국민시를 모아<야살의 서>에 수록되고 그것이 사무엘하 1장에 전재된 것 같다.
사울 왕의 사후 다윗은 블레셋군의 진지에서 예루살렘의 남서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헤브론으로 가서 옛부터 법궤가 있던 마므레에서 유다 집안의 사람들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유다 집안의 왕>이 되고 남방 유다국왕이 됐다.

사무엘하 5장은 다윗이 유다 집안의 왕이었던 기간을 7년 6개월이라고 했다.
그 사이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이스라엘 제 부족의 장로들은 세력 범위가 달라지면서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 왕에게 굴복하고 다윗과 게약을 체결하고 다윗은 장로들의 기름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왕권을 받아 그 수도를 헤브론으로 정했다. 전자의 즉위는 아마도 상호 호혜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지고, 후자의 즉위는 남과 북의 상당히 세력의 우열이 있는 당사자 사이의 계약 관계로 된 것이며, 그 지배권은 남과 북의 부족 연맹의 장로들을 통해서 된 것이다.
다윗 왕에게 있어서 에브스인의 도시 예루살렘이 남북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요로에 있기 때문에 남북 통일의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12부족을 통합하여 통일 왕국 지배의 기초를 삼고 그 왕국의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다윗 왕은 사울 왕의 패배 후에 성립된 남북 왕국을,즉 <전체 이스라엘>을 한 왕의 통치 아래 통합하고 에브스인의 촌읍 시온의 요새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그곳을 정치,군사.종교의 중심지로 삼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지배 영역을 넓혔다. 그 왕국은 제도적으로는 용병제도의 왕국이었다. 다윗은 왕국을 세우면서 특히 행정기구를 -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집트의 본을 딴 것 같다.
사울의 왕국을 거쳐서 다윗 왕국의 건설과 번영은 그에 앞선 판관시대의 전쟁의 성과와 그 시대의 국제 정세가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남쪽 이집트 제21왕조(BC 1085년경-945년경)가 쇠퇴기에 들어갔고,북쪽 앗시리아 왕조가 티그랏피레셀 1세(BC1115년경-1077년경)의 사망후 침체기에 들어갔기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지금도 <다윗의 성>으로 불리며,당시의 예루살렘은 현재의 성전 남쪽에 있는 구릉지대에 있었다. 성서에는 다윗 왕이 예루살렘 도시를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그것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해 돼 있다.

 유다의 자손의 계보

 유다 + 다말 = 베레스 - 제라
 베레스 = 헤스론 - 하몰
 헤스론 = 람-갈렙 (에브라다=후르-살마(베들레헴을 세움)
 람 = 아미나답 = 나흐손 = 살마 = 보아즈 = 오벳 = 이새 =
 이새 = 엘리압-아비나답-시마-느다넬-라때-오셈-다윗-스루야(딸)-아비가일(딸)


5. 다윗의 조가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이 노래는 야살의 서에 기록되어 있다.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아,용사들은 쓰러졌구나
 이 소문을 갓에 알리지 말라.
 아스클론 거리에 퍼뜨리지 말라.
 블레셋 계집들이 좋아하고
 오랑케 계집들이 좋아 날뛸라.
 길보아 산악에는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고,
 소나기도 쏟아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용사들의 방패는 더러워졌고,
 사울의 방패는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구나.
 요나단이 한 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둉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사울이 한번 칼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칼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사울과 요나단은 살았을 때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주홍색 옷을 입혀 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아,용사들이 싸움터에서 쓰러졌구나.
 요나단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디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 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아,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
                      (사무엘하 1장 17절-18절,구사료층)


6. 예루살렘의 노래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고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가닥 시온 노래 불러라"고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야훼여, 잊지 마소서, 예루살렘이 떨어지던 날,
 에돔 사람들이 뇌까리던 말
 "쳐부숴라, 바닥이 드러나게 헐어 버려라"

 파괴자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 것들은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시편 137편)

여기 인용한 시는 구약 문학 중의 걸작의 하나인 시편 137편이며, 기원전 6세기 초에 다윗의 성 예루살렘을 떠나 포로로 바빌로니아 각지로 끌려가는 포로민이 포로 기간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노래한 노래이다. 따라서 이 시의 형성 연대는 페르시아 왕 큐로스(BC 559-529)에 의한 바빌로니아 정복 이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예루살렘은 헤브라이어로 예루샬라임,아라비아어로 바리톨.막디스 또는 알.크투스라고 하며, 이스라엘 남북 양지방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하고 동쪽은 요르단과 접경하고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통한다. 서쪽은 중동의 <비옥한 초생달 지대>에 접하고 지중해 연안의 항구들과 철도 및 육공로로 연결되어 있다.


7. 예루살렘은 언제 성도가 되었는가

구약의 시인들의 노래한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초에 다윗(BC 1000년경-961년경)이스라엘의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 않은 이 땅을 에브시인에게서 쟁취하여 이 땅의 언덕의 동남일대를 수도로 정하고 정치 군사,종교의 본거지를 삼은 때로 소급된다. 에브스인의 촌읍 시온의 요새 예루살렘은 그후<다윗의 성>이라 불리고,현재는유대인에게 있어서 고대의 수도일 뿐 아니라 고대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제1,제2 성전이 있던 성역이기도 하고, 신성한 도시로서 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생애와도 관계가 깊고 많은 유적을 가진 거룩한 도시이며, 이슬람교도에게는 마호멧이 여기에서 승천했다고 전하는 까닭에 메카와 메디나에 버금가는 제3의 성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공화국의 수도이며 인구 36만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이다.
성도 예루살렘은 해발 약 800미터의 언덕 위에 세워진 천연의 요새이며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 삼면은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언덕은 동쪽은 키드론 골짜기, 서쪽과 남쪽은 힌놈 골짜기에 끼어 있으며,이 골짜기들은 남쪽에서 합류하여 유다의 황야에 이어지고 언덕 북쪽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신시가지가 접해 있다.
필자가 전에 예루살렘 헤브라이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의 예루사렘은 성벽을 끼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고, 구시가지는 요르단 왕국령이었기 때문에 성 밖의 이스라엘 공화국령에서는 문 안으로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밖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1967년 6월의 중동전쟁(6일전쟁)이후 구시가지(요르단측)와 신시가지(이스라엘측)을 가로막고 있던 벽과 철조망이 제거되고 구시가지는 이스라엘령이 되어서 지금은 자유롭게 이 두 지역을 왕래할 수 있다.
그리고 기원후 2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된 예루살렘은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에 의하여 재건되고 아일리아 카피토리나 Aelia Capitorina라고 개칭했다.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은 후 이 도시 이름은 다시 성서의 이름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이 되고 거룩한 도시가 되었다. 빛나는 과거를 가진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시인 것이다.


8. <예루살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루살렘>이란 이름이 구약성서 이전 기록에서 처음 보인 것은 기원전 19,18세기의 이집트 중왕국 제12왕국 시대의 <저주문서>에서이다. 즉 Urusalimum이라는 형태로 나온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서 기원전 14세기의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시대의 <아마르나 문서>에는 Urusalim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 문서에 의하면 당시 이집트의 세력이 가나안(시리아,팔레스티나>에도 미쳤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이집트의 관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헤브라이어 부분에는 <예루샬라임> Yyrusalayim이라고 돼 있으나 아람어 부분에는 <예루살렘>으로 돼있다. 70인역(그리스어역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서, 아람어의 발음이 기원전 2세기경의 실제 발음에 가까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예루>라는 말은 <기초>라는 뜻이며 (샬라임>이나 <살렘>은 헤브라이의 <평화>(헤브라이어에서는 생명이 넘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라는 뜻인 <샬롬>과 관계가 있으며, <예루살렘>은 <평화의 기초>를 의미한다고 해석돼 왔다. 그러나 예루살랴임 또는 예루살렘을 샬롬과 연결시키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로 무리가 있으며,근년에는 샬렘이라는 이름의 신의 보좌, 즉 샬렘 신전이 있던 것에서 유래된다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살렘 예배의 중심지가 된다.
앞에서 말한 <아마르나 문서>에는 침략을 계속하는 하피르의 습격에 관한 얘기가 있으며, 침입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음을 전하고 있다. 도시로서의 예루살렘을 관한 더 확실한 사적은 <아마르나 문서>보다도 약 400년이나 소급되는 기원전 1800년경의 중기 청동기 시대의 이 도시의 성벽이라고 한다. 발견된 것은 극히 일부이지만 성벽은 언덕 위로 향해서 뻗혀 있으며 성벽 전체의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 있다. 이 성벽으로 판단하면 고대 예루살렘은 현재의 구시가지에서 남쪽으로 뻗혀있는 두 언덕의 낮은 쪽에 있는 약 11에이커의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위치가 선택된 것은 물의 공급이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시에는 물을 복잡하게 굴착한 경로를 통해서 공급되고 있었다.


9. <슬픔의 성벽>은 왜 불굴의 재생을 나타내는가

구약 문학 중의 걸작의 하나인 시편 제37편의 열정에 넘치는 싯구를 읽을 때마나 필자는 1964년 크리스마스에 성지 순례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둘로 나누고 있는 국경선에 있는 만델바움 문의 검문을 지나 요르단 영으로 들어가서 구시가지에 쓸쓸히 서있는 <슬픔의 성벽>(유대인들은 <서벽>이라고 부른다)를 찾아갔던 일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벽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흘린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기념하는 것이라든가, 로마군이 성전을 파괴했을 때에 천사가 눈물을 흘리며 사수한 기념비라든가, 아침이 되면 돌이 이슬에 젖어 망국의 유대인의 슬픔을 이 성벽이 슬퍼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성벽은 솔로몬의 성전관계가 없다.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됐고 결국 헤롯 왕(BC 374-4)의 통치아래 놓였다. 헤롯왕은 로마 풍의 건물로 예루살렘을 개축하고 특히 바빌로니아 포로(BC6세기)후 재건된 제2 성전의 대개축을 하였다. 이 때의 성벽의 서쪽 벽이 <슬픔의 성벽>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원후 66년에 로마에 대해서 독립 을 요구한 제1차 유대 전쟁이 일어나서 기원후 70년에는 오히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AD 79-81)에 의하여 진압되고 성전을 포함한 예루살렘 전체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이 <슬픔의 성벽> 뿐이다.
현재의 성벽은 16세기의 이슬람 터키령 시대의 것이라고 하며, 성벽 하층의 거대한 돌들은 헤롯 시대의 것이다. 성벽의 폭은 54미터,높이 18미터,하층 9단에는 거대한 석회암을 쌓았으며,그중에는 9*1*1.5미터나 되는 큰 돌도 있으며, 상층 15단은 작은 돌로 쌓여 있다.
성벽의 높은 곳에는 우슬초가 무성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유대인에게 있어서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영광의 이스라엘의 기념비는 이 성벽이다.

66항에서 말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갈라놓은 냉혹한 성벽과 철조망은 6일전쟁의 3일째 되는 날에 제거되고 슬픔의 성벽 주위에 밀집해 있던 아랍인의 민가는 전후에 곧 철거되고 성벽 앞에는 수만명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생기고, 문자 그대로 <유대인의 광장>이 되었다.
<슬픔의 성벽>앞에서 다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전승의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전국 전세게에서 이 <슬픔의 성벽>앞에 모여 기도를 드리고 춤추고, 이스라엘군의 지휘를 맡은 모세 다얀 장군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모세에 비유해서 <제2의 모세>라고 찬양되고 있다는 것이다.


10. 왕위 계승 문제와 솔로몬의 즉위

다윗 왕의 만년에는 바쎄바 사건(사무엘하 11장-12장)에 이어 왕위 계승을 에워싼 비극적인 집안 싸움이 일어나고,결국은 임종을 맞이한 다윗 왕에 의하여 애처 바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가 되고 바세바는 궁정 예언자 나단, 다윗의 용병대장 브나야,제사 사독 등의 지지를 얻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다윗의 나귀에 태워 기브온으로 데려가 제사 사독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바세바는 다윗 왕의 생전에 그녀의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다윗 왕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간,예루살렘에서 33년간 합계 40년간의 통치를 마쳤다. 다윗의 생애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과 다사다난의 연속이었다. 한편 다윗은 그 40년 간의 치세에 이스라엘인의 정주 지역의 남서부를 차지하고 있던 블레셋인과 동부와 동남부 지역의 암몬인, 모압인, 에돔인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동시에 멀리 안티 레바논 산맥의 동부와 동남부 지역의 아람인들에 대한 지배권도 획득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통일과 독립을 실현한 것이다.
다윗왕의 사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솔로몬(BC 961년경 -922년경)은 형 아도니야를 노왕 다윗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왕위에 앉히려 한 자를 숙청하고 통치를 시작했다. 솔로몬의 즉위는 이스라엘 왕국의 카리스마적 이념을 타파한 왕위 세급제의 제1보였다. 솔로몬 왕의 치세에 관해서는 열왕기상 1장-11장과 역대기상 22장-하9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 왕은 부왕의 사업을 계승하고 그 지배 과정에서 왕국에 물질적 번영을 가져오고 실질적으로 외적의 공격에서 왕국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과 궁전의 신축을 완성하고 이들 건축 공사에 드는 모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고 군비를 갖추어 주변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주변의 백성들과 혼인이나 통상 관계를 맺어나갔다.
그러나 이들 국가적 제 비용은 통상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만으로는 부족해서 징세제도를 재정비하고 국토를 종래의 부족단위로 된 12 지방 장관(열왕기상 4장 7-19절)을 두어 관할하게 했다. 다시 말해서 그 지배권을 중앙집권 체제로 고쳤다.
한편 솔로몬 왕은 <법궤>를 다윗의 성에서 황금으로 덮은 장대하고 신성한 성전으로 옮겨왔다. 그 <법궤>는 민족족 통일과 종교적 충성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부족 공동체 시대의 관습을 답습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황야의 유목적 종교의 도시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성전에는 왕의 관료로서의 새로운 제사직이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종교적으로는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정치적으로는 부족제도를 해체하고 일단 고대적 중앙집권체제 국가로 편성되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일신교의 중심지로서,그리고 그 신성한 도시로서 특이한 존재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도시는 솔로몬 왕의 시대에 비로소 확장되었다.


11.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한 목적은 무엇인가

열왕기상 3장 16-28절에는 유명한 이른바 <솔로몬의 재판>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유명한 시바의 여왕의 솔로몬왕 방문 이야기는 열왕기상 10장 1-13절에 있다.
<시바라는 곳에 여왕이 있었는데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시험해 보려고 아주 어려운 문제를 준비하여 방문온 일이 있었다. 여왕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왔을 뿐 아니라 각종 향료와 엄청나게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싣고 왔다. 여왕은 솔로몬 왕을 만나자 미리 생각하였던 문제들을 모두 물어 보았다. 솔로몬은 여왕의 질문을 하나도 막히지 않고 다 대답해 주었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이 모든 지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 또 그가 세워 놓은 궁전을 보고는 넋을 잃을 정도로 감탄하였다. 시바의 여왕은 왕의 식탁의 음식,조신들 배석, 제복을 입은 시종들의 도열,술을 따르는 시종들, 또 왕이 야훼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를 보고서 찬탄해 마지 않으며 왕에게 말하였다.
"당신과 당신의 지혜에 대한 소문은 내가 이미 우리나라에서 듣고 있었습니다만 과연 사실이군요, 이렇게 와서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 이야기가 하나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들은 이야기는 이제 보니 사실의 절반도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번영은 내가 듣던 소문보다 훨씬 더 뛰어나십니다. 당신을 모시는 부인들이야 말로 행복한 여인들입니다. 언제나 당신 앞에서서 당신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는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기뻐하시어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히신 당신의 하나님 야훼께 찬미를 올립니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당신을 왕으로 삼아 법과 정의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여왕은 금 백 이십 달란트와 많은 향료와 보석을 솔로몬왕에게 선불하였다. 솔로몬왕은 시바의 여왕에게 선물 받은 것만큼 많은 향료는 두 번다시 받아 보지 못하였다. 오빌 지방에서 금을 실어 오던 히람의 상선대는 이번에는 굉장히 많은 오동나무와 보석을 운반해 왔다.
왕은 이 오동나무로 야훼의 전과 왕궁의 난간을 만들고 노래에 맞추어 뜯을 수금과 거문고를 만들기도 하였다. 솔로몬왕은 시바의 여왕에게 관례에 의한 답례물 이외에도 여왕이 요청한 것을 모두 주었다. 여왕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솔로몬왕의 지혜이지만, 시바의 여왕의 방문 목적은 솔로몬왕의 영화를 보고 훌륭한 지혜를 직접 듣는 것도 있지만,당시 다마스크스에서 홍해 연안까지,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대상 통로를 지배하고 있던 솔로몬 왕국의 실력으로 봐서, 그것은 상업적인 목적, 다시 말해서 외교 관계의 수립과 그에 따른 통상 관계의 증진이 주목적이었던 것 같다. 대상을 이끌고 솔로몬왕을 찾아온 시바의 여왕 이야기는 솔로몬왕의 교역활동과 그에 따른 거대한 부,즉 솔로몬의 영화를 생생하게 알게 한다.


12.게젤의 촌읍에서 출토된 가나안 달력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솔로몬왕 만큼 좋은 조건을 가진 왕은 없었으며, 그만큼 건축 사업으로 유명한 왕도 없다. 그리고 솔로몬왕 만큼 고고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킨 왕도 없다.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통하는 도로에서 북쪽으로 들어간 연안 평야를 한 눈으로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진 게젤의 도시(예루살렘 서북서 약 30킬로미터)는 오늘의 텔에샤살로 동정되고 있다. 이곳은 가나안을 남북으로 뻗는 고대의 간선 도로(바다의 길)과 아얄론 계곡을 지나 동쪽으로 뻗는 중요한 도로와의 접점이며 고대에 있어서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여호수아는 이 촌읍을 점령하지 못했고 가나안인이 장악하고 있었다(여호수아기 16장 10절, 판관기 1장 29절).
열왕기상 9장 16절에 의하면 이집트 왕은 게젤을 가나안인에게서 빼앗아 이 도시를 솔로몬의 왕비가 된 자기의 딸에게 주었다.그래서 솔로몬왕은 이 연안 평야를 통과하는 대상으로부터 통관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열왕기상 11장에는 솔로몬왕이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수청드는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이스라엘에 대항하고 있던 가나안인의 도시 게젤은 이렇게 예루살렘령으로 흡수됐다. 솔로몬은 이 오랜 도시를 개축하여 성벽을 쌓고 군사적인 요충으로 만든 것이다. 이 시기에 건조된 성탑이나 성문의 구조는 북부 갈릴리 지방에 있는하솔이나 이즈르엘 평야의 서남단에 있는 등 솔로몬이 세운 것들과 거의 같은 구조로 돼 있다.
이 이집트 왕이 제21왕조 (BC1085년경-945년경)의 어느 왕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브라함 마라민트<역사 기록으로 이집트 왕이 자기 딸을 외국의 왕에게 시집보낸 것은 이때 한 번 뿐이었으며 이것은 솔로몬왕이 당시의 오리엔트 나라들 왕 중에서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게젤의 유적지는 장방형으로 면적 12헥타르의 로마시대 이전에 있어서의 가나안 최대의 도시였다. 1902-1909년에 R.A.S.마가리스타에 의한 발굴 조사가 진핸되어 기원전 4000년경의 지하 혈거지와 기원전 1500년 경의 길이 67미터나 되는 지하 수로와 계단,그리고 유명한 높은 곳의 석주등이 발견되었다. 그후 1934년에 A.로우에 의하여 부분적인 발굴도 있었다. 1964년 - 1973년에 미국의 히브루 유니언 대학의 조사대에 의하여 처음에는 G.E.라이트,이어서 W.G.디버의 지휘 아래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제1지구에서 확인된 것은, 이래 고적지는 17개의 문화층으로 돼 있으며 ,깊이 7.6미터이고,후기 청동기 시대에 시작되었고,로마시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이 밝혀졌다.
1908년에 R.A.S.마카리스타(팔레스타인 답사단)에 의하여 기원전 10세기 (BC 925년경로몬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를 새긴 석회암의 작은 서판,즉 학생용 석판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농력이며,<게젤 달력>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는 각 달의 이름과 각 달에 하는 농사 일람표가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에는 농업이 공업보다도 훨씬 중요한 일이었음이 역력히 보인다. 1년간에 해야 할 여덟 단계의 농사일을 순서 대로 기록한 <게젤 달력>을 12개월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12와 (9월-9월)은 필자가 넣은 것이다.


 1. 그의 두 달은 올리브의 수확(9-10월)
 2.(10-11월)
 3.그의 두달은 곡물의 파종(11-12월)
 4.(12-1월)
 5.그의 두달은 늦은 파종(1-2월)
 6.(2-3월)
 7.그의 달은 삼을 갈고(3-4월)
 8.그의 달은 보리를 걷어들이고(4-5월)
 9.그의 달은 추수와 축제(5-6월)
10.그의 두달은 포도의 손질(6-7월)
11.(7-8월)
12.그의 달은 여름 과일(8-9월)

이 농력에 의하면 1년은 가을부터 시작한다. 출애굽기 34장22절에 의하면 가을의 수확(후일의 초막절)은 해가 바뀔 때에 하였다. 1년은 위와 같이 농사가 관련된 태음력의 12개월로 돼있었다.
그러나 이 게젤 달력은 달 이름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이 달 이름은 어느 시기부터 가나안의 옛날 이므이 점차로 숫자의 달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 http://kcm.co.kr/bible/old/bib01/old5.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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