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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8-31 10:59
종교개혁 이전의 부흥운동 - 1300~1500
 글쓴이 : admin
조회 : 4,204  
종교개혁 이전의 부흥운동 - 1300~1500

'요한 위클리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요한 후스'
 
예영수 박사 : 오레곤대 A.D, Ph.D(영문학), 경북대 교육학 박사과정이수, 전 한국외국어대학사범대학장, 한신대학 대학원장, 전국 기독교대학교 대학원장협의회장, 광나루 문인회장, 현 한밀선교회장, 한국영성 총연합회 대표회장, 카리스월드 편집인 겸 발행인
 

■시작하는 말: 교회 갱신운동의 배경


중세의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부흥운동의 역사는 그 다음에 오는 세기들보다 풍요롭지는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기간동안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띄엄띄엄 부어주신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시기의 대부분의 부흥운동은 성직자들이 부패한 세계로부터 초기교회의 사도적 크리스천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중세 각성운동은 종교개혁 이전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됐다. 교회가 부패한 반작용으로 수도원 제도가 생겨났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7,000여명의 승려들이 갱신운동에 참여했으며, 그 중에서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창설한 눌시아의 베네딕트(480-543)가 유명하다.
13세기 초엽에 프란체스코가 세운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수도회는(1210년) 향락을 포기하고 빈곤, 순결, 순종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젊은 여성인 클레어(Clare)는 프란체스코와 같은 ‘가난한 클레어’ 여수도원(1215년 경)을 세웠다.
1176년경 프랑스 리용의 부호 사업가 피터 월도(Peter Waldo)는 번역된 신약성경을 읽고 예수의 청빈 생활에 감동을 받아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란 평신도 선교그룹을 조직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이들을 월든시안들(Waldensians) 혹은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교황은 월든시안들에게 설교를 못하도록 금지했으나 거절당하자, 1184년에 이들을 파문했다. 이들은 수세기 뒤에 자유를 얻을 때까지 비밀 처소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며 성경은 자기나라 말로 번역되어 읽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수님의 예를 따라 둘씩 짝을 지어 선교를 했으며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초청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부흥운동은 주로 영국 종교개혁자 요한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의 종교 개혁자 요한 후스(John Hus, 1373-1415), 그리고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규탄하고, 교회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성경을 라틴어에서 모국어로 번역하여 사용할 것을 주장한 결과 이단으로 정죄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뿌린 씨는 훗날 말틴 루터에서 그 열매를 거두게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부패한 가톨릭의 잔상 위에 신교가 탄생하게 됐다.

1. 요한 위클리프 : ‘롤라드’ 부흥운동

위클리프는 여러 해 동안 영국 대학가와 교계를 향해 초기 교회의 성서적인 유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의 가르침은 이단적이며 잘못되었다고 정죄했다. 위클리프 이전에는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게 했으나 1382년 위클리프의 제자들은 가톨릭 교회와의 오랜 전통을 끊어버리고 신구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1천년 동안의 전통을 깨고 유럽의 언어로 성경이 완역된 것은 처음이었다.
위클리프는 순회 설교자들을 조직하여 영국 국민들에게 직접 가르쳤다. 말틴 루터가 위텐벨그 성 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붙이기 2세기 이전에 위클리프를 따르는 ‘가난한 사제들’은 영국 전역의 마을을 돌면서 영어로 설교했으며,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롤라드 부흥운동은 기성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1382년 그리스도의 승천 날에 영어로 첫 설교를 한 ‘롤라드’는 니콜라스 히어포드였는데, 이것은 영국 전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됐다. 역사가들은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아침 별’이라고 불렀다.
기성 교회는 이들 ‘가난한 사제들’을 ‘롤라드들’(Lollards)이라고 불렀다. ‘롤라드’란 것은 ‘중얼거리는 자, 가라지, 위선자, 게으른 자’라는 여러 가지 뜻으로 기성교회가 갖고 있는 이 운동에 대한 적개심을 잘 나타낸 명칭이었다.
‘롤라드’ 부흥운동은 위클리프가 죽기 2년 전에 시작됐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롤라드 부흥운동을 촉진시켜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15세기 초엽에는 영국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성경만이 모든 교리와 실천을 위한 궁극적인 권위라고 말했다. 교황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할 때는 믿어선 인된다고 함으로써 기성교회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위클리프를 정죄했으며, 1382년에 켄터베리 주교의 지휘아래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교리 24개 항목을 정죄했는데 10개항은 이단으로, 14개항은 잘못된 것으로 판결했다.
위클리프는 1384년 12월 3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위클리프가 죽은 다음 44년이 지난 후에 교황은 칙령을 내려 위클리프의 사체를 발굴하여 이단으로 화형에 처하게 했으며, 그의 재를 테임즈 강에 뿌리게 했다. 위클리프의 재가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감과 동시에 그가 조직한 ‘가난한 사제들’(롤라드 부흥운동)의 복음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으로 계속 전달됐으며, 평신도 운동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1523년에 네덜란드의 신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롤라드’운동을 ‘정복되었으나 소멸되지 않는’ 부흥운동이라고 했다.


2. 요한 후스 : 개혁운동

위클리프의 책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프라하의 거리에서 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혀져서 보헤미아의 사제인 후스에게 전달됐다. 후스는 강단에서 위클리프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으며 군중들은 그를 따랐다.
후스는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교황도, 추기경도, 사제들도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의 메시지를 국민들은 받아들였다. 1412년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다가 참수 당한 세 젊은이들의 장례예배를 공개적으로 인도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됐다.
후스도 위클리프처렴 성경은 백성들의 언어로 쓰여져야 하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며, 성경만이(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최종적인 권위가 있다고 했다. 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고, 교황과 추기경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로마 가톨릭의 정통 교리를 거부했다. 후스는 예수님 이후에 3백여년 동안 추기경들 없이도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부인했다.
후스는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는 말씀에서 교황(베드로에게서 물려 받은)이 반석으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반석이라는 것이다. 교황도 오류를 범하고 타락하여 이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황도 유다의 계승자일 수 있고 무지, 탐욕, 기만 등으로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스는 성직매매에 대해 채찍질을 가하고, 프라하의 최고 부자인 사제들을 ‘주님의 살찐 자식들’이라고 공격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찬식을 거행하고도 돈을 받았으며, 직위에 해당하는 것보다 몇 갑절의 봉급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후스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누더기 옷을 입고 울고 있는데 나의 사제들은 주홍색 사제들은 호화로운 목욕을 즐기고, 나는 밤을 지새우면서 조롱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있는데 사제들은 축제와 술 파티를 즐기고, 나는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고 있는데 사제들은 최고로 부드러운 침상에서 휴식하고 있구나.”
후스는 1414년 가을 독일 겸 로마의 황제인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의 안전귀환의 약속을 칙서로 받고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1415년 7월 6일 후스에게 30가지 이단 죄를 적용하여 화형에 쳐해버렸다.
후스는 56세 생일날에 화형 당하여 순교자가 됐다. 화염과 연기 속에서 후스는 찬송을 부르면서 죽어갔다. 황제와 교회에 의하면, 이단은 사람과 하나님 앞에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에 이단과의 약속(안전귀환에 대한 약속)은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스의 죽음이 전해지자 체코는 프라하에서 봉기하여 무엇보다 가톨릭 교회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교회를 약탈하고, 후스를 반대한 사제들을 습격하여 검으로 찔러 죽이고, 사제들을 강물에 던지기도 했으며, 후스를 반대한 시의원 7명을 창 밖으로 던져 군인들의 창에 찔려죽게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보헤미아에서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교회에 걸어놓고, 순교자를 위한 미사를 거행했다. 452명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가장 강한 귀족들이 단결하여 후스파에 가담했다. 후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후사이트’(Hussites)라고 불렀다.
후스의 설교가 뿌린 씨는 뿌리를 내려 ‘보헤미아 형제단’(Bohemian Brethren)이 탄생됐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지하교회와 시골 마을에서 숨어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진젠돌프 백작의 저택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의 위대한 종교지도자로서 훗날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한 위대한 선구자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3.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부흥운동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말틴 루터가 태어나던 1452년에 설교자의 경력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 플로렌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의 부흥운동은 플로렌스 도시를 휩쓸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위대한 철학자들과 아퀴나스의 글에도 심취하는 등 지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겸비한 사제였다.
그는 아주 젊었을 때 환상가운에 주님을 만났다. 주님은 이탈리아의 개혁운동을 시작하도록 이탈리아의 심장부인 플로렌스에 자신을 보냈다고 말했다. 젊은이로서 그는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수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금식했다.
그는 29세 때 플로렌스의 성 마가 성당에 소수도사로 보냄을 받았다. 플로렌스는 당시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가장 아름답고 교양이 있는 도시였으나, 사보나롤라는 축제와 향락과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는 플로렌스 사람들의 부패한 삶에 실망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대한 강도 높은 설교를 했지만 교양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이 시점에서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수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환상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미래에 닥칠 교회의 재난들을 보았다. 그 순간부터 그는 설교할 때마다 새로운 기름부음으로 채워지게 됐다.
그는 기도할 때 자주 쓰러져서 황홀경에 몰입되어 주변의 모든 세상과는 접촉이 끊어졌다. 1446년 성탄 전날 밤 설교단위에 앉아서 5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가 설교단위에 앉아있는 동안 그의 얼굴은 온 교회에 밝게 빛을 발했으며 그의 눈에서는 천국에서 오는 것처럼 빛의 줄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플로렌스의 보다 큰 듀오모 사원에서 설교하게 됐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성당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밤중부터 교회 문 앞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의 설교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사람들은 거리를 가면서도 찬양을 했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힘에 이끌려서 행동하는 것 같았으며 그와 함께 청중들을 몰고 가는 것 같았다. 모든 플로렌스가 이 위대한 설교자의 발 아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플로렌스의 통치자인 로렌조 더 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이 젊은 설교자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보나롤라는 1년 안에 세 사람 즉 로렌조, 교황, 나폴리 왕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그 일이 있은 2년 후에 프랑스의 찰스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나폴리를 약탈했다. 찰스 8세가 플로렌스로 진격해 왔을 때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도시와 자신들을 구원하라고 외쳤다. 시민들은 그의 말대로 회개했다. 그는 찰스 앞에 나가서 플로렌스에 자비를 베풀 것을 간청했다. 찰스는 플로렌스를 약탈하지 않고 물러갔다. 그는 만일 찰스가 플로렌스르 떠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의 침공 동안에 메디치 정부는 붕괴됐다. 플로렌스 시민들이 사보나롤라에게 와서 어떤 형태의 정부가 좋은지를 물었다. 그는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세무제도, 고문의 중지, 도박의 금지, 부당한 재판의 재심 등의 법률을 제정하게 했다. 그가 쓴 도시 정부 체제는 온 유럽을 위한 모델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플로렌스의 부흥운동은 너무나 영향력이 커서 깡패들도 음란한 노래 대신에 찬송가를 불렀다. 아이들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카니발과 향락장소나 사악한 행사에서 가지고 온 모든 물건들을 모아와서 광장에서 태웠다. 그런 물건들이 너무나 많아서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올렸는데 높이가 60 피트, 직경이 240피트나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보나롤라의 이러한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교회와 국가의 부패에 대한 강도 높은 공격은,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교황 알렉산더 4세는 사보나롤라가 예언의 말을 하지 않기를 거절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파문했으며, 그에게 감정을 품은 많은 적들이 교황의 정죄에 가세했다. 교황은, 위클리프와 후스의 경우처럼 사보나롤라를 투옥하고는 1498년 플로렌스의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버렸다.


맺는 말

위클리프의 롤라드 부흥운동, 후스의 개혁 운동, 사보나롤라의 플로렌스 부흥운동은 박해를 받아 소멸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부흥운동의 빛은 중세 말기에 다가오는 종교개혁운동의 방향으로 빛을 발하였다. 이들 개혁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의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다.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후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그들이 행한 업적으로 평가되기보다는 그들의 선례를 따른 사람들이 훗날 이루어 놓은 역사적인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카리스월드

( http://jmf.or.kr/jmf/technote/read.cgi?board=holy_school&y_number=69 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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