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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2-26 19:38
TCC 6-1 죄사함의 이해와 그 적용은 목양과 상담에 큰 유익을 준다
 글쓴이 : 한상휘목사
조회 : 3,146  
제 13장 상담에서의 용서 (Forgiveness in Counseling)
            구원론 계속 (The Doctrine of Salvation, Continued)


인간의 최대 필요는 무엇 보다 죄 사함 (용서함)을 받는 것(forgiveness)이다. 죄로 인하여 형벌의 죽음과 가시 엉겅퀴와 질려가 인간에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 사함을 받는 일이 곧 구원을 받는 일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가르쳐야한다. 모든 문제가 죄악 때문이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죄 사함을 받아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 것 처럼 인생에 중요하고 의미있고 행복한 일이 어디 더 있으랴!

자기의 죄만 사함 받을 것이 아니라, 또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신 주님의 분부이심을, 역시, 알려 주어야 한다.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이켜 용서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죄 사함을 계속 받기 위 하여는 구원받은 은혜의 즐거움이 늘 있어야 하고, 매일 매순간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그날 그 순간의 죄를 회개하고 자백할 때,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여야 한다.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은혜가 감격되지 않으면

  ①  첫사랑을 버려 떠나기 쉽고 (계 2:4 easily leaves his 'first love')
  ②  헌신생활이 되어지지 않으며 (cannot draw his commitment to the Lord)
  ③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 한다 (tend to lack the forgiving attitude toward others)

그리스도의 죄 사함, 남에게 베풀어야할 용서 (마5장 /남을 용서하고 예배 전에 화목, 마18장 / 권징과 형제사랑) 등이 교회와, 신학교와, 상담소와, 사역지에 가득하여야 한다. 기독인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는 항상 죄 사함과 용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의 죄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였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에 능력이 새어 나가는 구멍이 많다. 많은 부분이 대인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용서의 원리를 잘 가르치고 서로 적용하여 실습하지 못한 게으름 내지 죄악이 그 대부분을 이룬다.

진리는 자유하게 하는 권능이 있다. 진리의 교회에서는 사람들을 얽어매는 속박을 풀어 주는 자유 함이 있어야 한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도록 하는 진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 사하심의 은총을 받게 하여 매일의 삶에서 용서받은 신자가 되도록 하자! 

오늘날 죄를 죄라고 고백하고 회개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요즈음 ‘죄를 죄'라고 (Say sin 'sin') 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달고 나타나는게 문제이다. 범죄가 어쩔 수 없었다거나, ’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다. 범죄를 따라 그들의 변을 들어보면 범죄를 일으킨 원인이 그들에게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의 세대는 ’책임 전가들의 명수‘들의 운동경기 같은 형국이다. 죄를 죄라고 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여 타협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장치하여 놓으신 ’죄 사하심과 성령을 받게 하심‘이라는 복을 잃어버리고 말게 된다. 

죄는 사함 받아 용서 받아야 되고, 병은 고침 받아야 된다. 죄악을 병으로 바꾸어 버리면 그 병을 위한 약을 구하거나 만들어 먹일 수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 원인은 죄이기 때문이다. 죄를 사함 받아 용서 받도록 ‘죄 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고, 회개하면서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와서 자복하며 통회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해결 받아야 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성도들을 목양하면서, 그 문제들이 ‘죄’일 때, ‘죄’라고 해 주어야 하고, 그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성령 받아 주님의 죄 사하신 확신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죄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 처방인 것이다. 

죄가 병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죄가 곧 병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 진단된 병에는 맞는 약이 없다. 오진은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잘못 된 약이 그릇 진단된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치고,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서 내리신 처방을 임의로 고사시키거나 없앨 수 있는가?

없다 !

I. 성경에 나타나는 용서라는 말
  (The Language of Forgiveness in the Scriptures)

A. 구약에서

  1. 살락 (Salach "들어올림으로 가볍게 한다 / to lighten by lifting")

어떤 사람의 무거운 짐을 들어올림으로 가볍게 하여 주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용서하다”, “죄를 사하다”로 번역된다. 신약 대용어는 헬라어 aphiemi가 이에 가깝고, hileos eimi 혹은 hilaskomai ("불쌍히 여겨주다", “자애를 베풀어주자” 등의 의미/눅18:13)와 연결된다. 범죄자를 은혜로 되돌려 준다는 의미도 있다. 여기에서 “속죄”(atonement)의 사고를 암시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주 “속죄”로 표현(레4:20, 26, 31, 35; 5:10, 14, 15, 18) 되고 이들은 곧 용서와 연결된다. 신약의 고전적인 주석으로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하심이 없다”는 히9:22에서 찾을 수 있다. 

  2. 나사 (Nasa “들어올림으로 치워버리는 것/ to take away by lifting up or off)”

“살락”이 죄 짐을 들어올림으로 가벼워지는 안도를 가리킨다면 “나사”는 들어올림으로 치워 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다음 문맥에서 얼굴, 머리, 손, 목소리, 마음들을 들어 올리는 경우를 가리키기도 하고 (창 4:7 등), 어린이나 옷가지 등을 들어 나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용서에 관한 한 이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 여기에서 중요하게 노트 할 일은 “죄를 치워 버린다”는 개념이다 (창50:17; 출34:6-7; 시32:1,5; 호1:6; 출34:6 참고).

B. 신약에서

  1. 아피에미 (Aphiemi “풀어주어 허락하며 가게 한다 / to let go, release or remit”)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LXX Septuagint)에서는 구약의 “살락” (salach)을 “아피에미”로 번역하였다. "용서받은, 취소된 빚"이라는 개념으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진 빚은 다 갚지 못하여 죄인 된 사람을 석방하여 풀어줄 때 사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지불된 빚의 개념을 제시하게 되었다. 주전 196년경으로 추정되는 로제타 비 (Rosetta Stone) 에는 “완전면제/면세” (“eis telos apheken” / total remission [of certain taxe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p188). “아피에미”라는 이 말은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모두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어온다 (마 18:27, 32; 6:12). 이 말 뒤에 흔히 “빚 (debt)”이라는 말을 데리고 다닌다. 범죄와 같은 말이 함께 사용되었을 때는 그 범한 죄를 사하여 풀어 없앤다는 말이다. 범죄들(trespasses)을 풀어준다는 말 (눅 7:41,42)은 범죄로 인하여 진 빚을 처리하여 준다는 뜻이다. 또 마음의 생각과 그 품은 죄 (죄악된 사고)를 용서한다는 예도 있다 (행8:22). 죄는 빚으로 나타난다. 빚은 갚거나 사함 받아 면제받거나 탕감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말의 명사형인 "아페시스"(aphesis)는 “석방”, “사해줌”을 일컫는 말이 되면서 늘 죄 (hamartia) 와 범죄(trespass)의 해결사로 등장하였다 (골1:14; 막3:29; 엡1:7; 행5:31, 13:38, 26:18; 눅4:18 참조).

  2. 카리조마이 (Charizomai “무조건, 무상으로 용서를 준다
    / to bestow forgiveness freely or unconditionally”)

"은혜, 배려"(favor, grace)를 뜻하는 “카리스”(charis)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무조건”, “값을 바라지 않고 공짜로”준다는 의미이다. 죄 사함은 그러므로 무조건 그저 베푸시는 은혜요 배려라는 차원에서 이해된다. 죄 사함을 받는 자가 갚을 능력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은혜의 배려로 그저 흉악한 그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이다. “키리조마이”의 은혜는 죄 사함 받는 자에게 그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베푸는 이에게 그 값을 요청하는 것이다 (엡4:32; 골2:13, 3:13; 눅7:42,43 - 여기서 빚은 무료로 취소/cancelled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형벌을 위하여 내어 주심이 되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취소하셨다. 여기에서 영어의 “용서하다”(forgive) 라는 말이 생겼다. 접두어  for (fore가 아님) 는 부정접두어로서 다음에 오는 “준다”(give)를 부정하는 말로서 →“주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곧, ‘마땅한 처벌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용서”라는 말이다.   

II. 죄 사함의 의미 (The Meaning of Forgiveness)

“마음”이 사람의 내적 실제를 말하는 것일 때 그와 반대되는 외모, 말하는 것, 생활의 모습 등과 비교하여 말하면 이해가 좋듯, 여기서 우리는 죄 사함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반대되는 내용을 몇 군데 살펴 용서가 되는 것을 이해함으로 죄사함의 의미를 이해시키고자 한다;

A. 마가복음 3:28-30 

막 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온갖 죄는 다 사하심을 받을 수 있으나 한 가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성령님을 훼방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훼방(blasphemy)”은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말한다. 간음 같은 죄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아니라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 (말, 행동, 생각)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이다. 곧 성령님을 더러운 귀신들린 영이라고 부르는 일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하셨다. 성령님을 그보다 더 악하게 부를 수 없다. 성결의 영이신 하나님(롬 1:4)을 불결의 영으로 모독한 사실이다. 악인들은 선을 악이라고, 악을 선이라고 뒤집는 자 들이다 (사 5:20). 이러한 자들은 위의 29절에서 보듯이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가 임하여 영원한 죄의 형벌인 사망에 처하게 된다.       

죄에 처한다는 말은 죄의 형벌을 받는 책임 (liability 29절의 anochos) 을 면하지 못하여 “처벌을 받아야하는” 숙명적인 존재가 된 것을 선포하신다. 참람 (blasphemy/훼방하는 말)하다 하여 막 14:64절에서는 예수님을 “죽여 마땅하다”고 할 때 anochos 를 썼다.

막 14: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 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죄인으로서 받아야 할 블 이익을 이제는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고 그 형벌도 모두 사라졌다는 선포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

주님이 베푸신 용서하심에는 이와 같은 신적 능력의 사유하심이 임하는 것이다. 목회자와 그 목회에서 상담과 제자 훈련에서 이와 같은 은혜의 주님을 늘 알 게하고 깨닫고 감사하는 삶에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처벌의 위협이 제거되었으니 우리는 진실로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 죄책의 무거운 멍에가 벗겨진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그럼으로 구원의 확신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친다.

B. 사도행전 7: 60 (p191)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눅 23:34참고)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눅 23:34) 하시던 주님의 가상기도를 반향 하는 스데반의 기도이다. “Me stese autois"라고 기도하는 말은 "저들에게 내려놓지 마소서", "저들을 향하여 서지 않게 하소서"와 같은 기도였다. “죄가 더 이상 저들에게 무거운 것으로 내려지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혹은 “저들을 향하여 죄의 형벌이 대적하여 서지 않게 하소서”와 같은 내용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구약의 스가랴(대하 24:21,22)는 스데반처럼 죽는 순간을 당하였을 때 “야훼 하나님 이를 보시고 갚으소서”하였는데 “갚으 소서”라는 말 “다라쉬 (darash)”는 “정의를 요청하다”, “공의대로 보복을 원 한다”라는 말이다. 되어진 바에 대한 보복을 요청하는 것이다. 저들이 현재 하는 바에 대하여 신원하시어 그 값을 지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과 스데반과는 정 반대의 기도이다. 신약에서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용서의 모델을 강력하게 도입하였다 (롬8:1-2 “해방과 정죄함이 없음”). 예수님의 은혜로 받은 죄 사함은 처벌이 제거되고 정죄함이 없는 해방이다. 일찍이 예레미야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죄를 찾으려 하여도 찾지 못하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렘 50: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시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C. 호세아 8:13, 9:9

호 8:13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지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호 9:9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죄를 기억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서술한다. 처벌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다. 요한 삼서 10절을 보자;

요삼 1: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 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벌이 진정으로 죄 사함 받고 거듭난 성도에게는 더 이상 문제로 잔존하지 않는다 (롬 8:1-2). 거듭난 의인답게 살면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전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죄 사함의 도리를 알려 줌으로 그들로 하나님의 형벌을 그리스도안에서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을 늘 살펴야 하겠다. 

III. 죄 사함의 근거 (The Basis for Forgiveness)
    (약간의 신학적 고찰 / Some Theological Considerations)

죄 사함을 받는 자에게는 죄 사함에 대한 값을 값으로 갚지 않는 “무조건/무상/무료”임을 카리죠마이 라고 하는 신약 헬라어에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죄 사함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① 그 죄를 하나님의 신적 권위로 간과 (overlooking of sin) 하는 것이 아니며,
  ② 그 죄의 책임을 넘겨 버리는 (by-passing of liability)이 아니며,
  ③ 죄악을 눈 감아 주는 것 (winking of guilt)도 아니다.
 
죄 사함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받기도 쉽고 책임도 없다고 하지만 죄 사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죄 사하여 주시는 그 일을 하나님이실 지라도 그냥 사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베푸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희생이 있다. 스스로가 공의롭지 못한 일을 스스로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무료로 임하는 죄 용서하심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하나 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치심으로 허락하신 고귀하신 은혜이다. 히 9:22, 10:18은 선언하기를, 피 흘리심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고 하였다. 레 4,5장도 속죄가 얼마나 죄 사함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말한다.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던 날 밤, 주님은 “이것은 죄 사함 (아페시스)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다.

죄인들을 위하여 그냥 아무 죄도 없는 것으로 하시면 될 텐데 왠 속죄이며 웬 피며 웬 제사인가 ? 하는 질문들이 자유 신 신학 (liberals)에서 나온다. 좋은 질문이지만 하나님은 진노와 긍휼을 모두 다 나타내시기를 원 하신다 (롬 9:22,23).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진노와 긍휼 양면의 만족을 이루시도록 하나님 스스로의 법대로 속제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고 피를 흘리게 하셨다 (p193).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들을 공의의 질서에 따라 그냥 묵과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꼭 만족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시는 대속의 제사의 희생이 되셔야 하였다. 그 대속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켰음으로 자기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구주가 되실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롬 3:24-26). 긍휼과 진노가 십자가상에서 입을 맞춘 것이다 (Mercy and wrath kissed at the cross) (p193).   

용서하여 줌과 용서받는 일은 당사자간의 일이다. 죄를 진 사람이 그 죄로 인하여 형벌을 내리시는 분과 해결하여야 할 일이다. 내가 뉘 코피를 내도록 때렸을 때 나는 코피 흘리는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 용서가 되는 것이지 제 3자에게 용서받는 것은 해당이 없는 일이다. 모든 죄악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에게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주님도 이 용서를 위하여 죄의 값인 사망을 치루셨다. 위에서 말한 대로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런데 죄 용서를 받아야 하는 성도들이 그 “용납”(acceptance) 혹은 “용서 / 죄사함 받음”(forgiveness)을 동일시(equates)하고 있다. 고백되어지지 않고 참회되지 않으며 용서함 받지 못한 죄를 하나님은 간과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기독인은 “현재 있는 그대로 무조건 은혜로 용납해야한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혹이 이들은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수준이 좋다고 할 지 모르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여서 주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무서운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조건적이다. 죄 사함의 용서를 로져스 학파(Rogerianism)에서 말하는 "무조건 긍정적 인 배려”(Unconditional Positive Regard)로 동일시하여서는 안 된다. 

용서는 존재하는 죄를 무조건 지워 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구원을 받아 드림으로 처리하여 치우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용납(acceptance)”이론은 그리스도 대속 없이도 다른 이들을 용납한다는 것이다. 용납은 남이 요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하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크리스쳔 심리학화인 (Christian Psychologizer)인 David Augsburger의 책, The Freedom of Forgiveness, (Chicago: Moody, 1970) pp.3,6,37,39의 인용을 주목하자 ; “그리스도의 방식은 요청 받기도 전에 이미 죄 사함을 주는 것이다... 용서를 받아 산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현재 모습 그대로 기꺼이 용납하는 것이다.... 용서란 어떤 예외가 없이 용납하는 것이다.... .” 

일흔 번 씩 일곱 번 이라도 남이 나에게 저지른 과실을 용서하라고 (마18:22) 주님은 말씀 하셨다. 이는 나에게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취하여야 할 우리의 자세이다. 주의하여야 할 일은 우리가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죄의 범위를 알자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지은 죄 중에서 되 돌이킬 수 없는 죄들은 남에게 용서받았다고 하여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셔야 만 될 죄를 지은 일은 사람이 용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은 과실”(transgression)을 용서하라고 하셨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이런 과실에 대하여는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여야 한다 (엡 4:32).

하나님께 대한 죄는 꼭 하나님께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야 생활에 변화가 온다. 그리고 사람과의 죄와 과실은 그 당사자에게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도 성령님께서 역사 하셔야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죄, 곧 하나님께 회개하여야 하는 부분은 피조물이 궁극적인 죄악을 처리하여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믿게 하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만 처리되는 것을 임의로, “괜찮다, 상처를 치유하라, 긍정적으로 배려하라”는 식으로 땜 빵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리를 어겨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   

신신학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심 좋은 “용납” 혹은 “용서”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은 무수히 모독을 당하셨다. 죄는 하나님께 용서 받아 죄 사함을 경험하여야 마땅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죄인은 사랑하시고, 죄만 미워하신다 -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죄만 미워하여야한다“고 한다. 듣기에 좋은 말 같지만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하나님께선 죄를 미워하시고 처리되지 않은 죄를 지옥 보내실 때 죄인을 지옥 보내시지 죄만 지옥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죄인”된 인간은 이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죄는 사람의 틈을 타서 일을 저지른다. 이 죄를 은닉하거나 모른체하면 안된다. 저지른 죄에 대하여 그는 그 죄를 회개하면 된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를 징벌하실 때에 사람이 심판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목양에서, 교육에서, 상담에서, 제자 훈련에서... 죄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막연한 3 인칭의 일처럼 하여서는 안 된다. 나와 죄, 너와 죄, 우리와 죄, 죄와 죄인의 관계에서 ‘죄를 지은 자는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여야 하나님의 축복의 처방은 약이 되게 되어 잇다. “죄를 죄라고 말하여야 한다”(call sin ‘sin’)는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에 대하여 주님이 기도 하셨다; “용서 하여 주시 옵소서 !” 또 오순절 날 성도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죄 사함 받았다. 모두 옳은 말씀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앞에서“어찌 할꼬”하는 회개가 있었고 (행 2:37)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가 상달되자 훗날 베드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피가 저들에게로 내려가게 하셨다. 그리고 저주가 임하는 그것을 지우고 다시 사는 길로 “복음”을 주셨다. 예수님을 저주하던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야만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받는다. 회개 하는것 없이 예수 믿는 다는 말들, 그리고 자기 스스로 구원 받는 것 같은 희미한 신앙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자기를 바로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 천하 인간에 예수님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행 4:1-2). 죄책 (guilt)과 죄책감 (sense of guilt / conviction)의 문제는 여기서 약간 자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유는 성경을 심리학화 하는 자들이 이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IV. 기독교 상담에서의 죄책의 좌소와 목적
    (The Place and Purpose of Guilt in Christian Counseling)

죄책을 깊이 있게 다루어야 용서의 개념이 분명해 진다. 조책 (guilt)이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나 되어진 죄악으로 인하여 생겨난 처벌을 문책 받아야 할 마땅한 챔임 (culpability)이다 (참고 / 心理學에서의 “죄의식”, “양심의 가책” / Guilt Feeling).

“용서” 혹은 “죄 사함”을 가리키는 말들은 우리가 앞에서 본대로, 죄책의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거나 우리가 진 빚을 탕감하며, 우리를 대적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 등과 연관되었다 (p196).

여기서 내라모어(Bruce Narramore)와 빌 카운츠(Bill Counts) 두 사람이 공저한  죄책과 사유 (Guilt and Freedom, Santa Ana : Vision House Publishing, 1974 → 최근에 다시 책명을 바꾸기를 Freedom from Guilt 로) 이라는 책에서 다음을 생각하기로 하겠다 (이하 이것에 대하여는 N/C로 약하여 부르겠다) ;

V. 죄책의 목적은 무엇인가 ? (What is the purpose of guilt ?)

N/C는, 결론부터 말하여서, “죄책”을 강조하여서는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고백하는 신앙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신앙적 잘못을 범하면 마음에 죄책감(sense of guilt)을 느껴 양심에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바른 사람 되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성경적이고 기독교 고전적인 신앙관이자 생활관이다. 그런데 스스로 보다 성경적이라고 하는 N/C는 죄책감을 점점더 자극시키고 야기 시켜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나쁜 느낌을 성도들에게 주어서 무엇이 좋겠냐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면에서 N/C에게 비성경적인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급기야 N/C는 성경적으로 전승(傳承)신앙을 가진 일꾼들을 “죄책놀이”게임을 하는 자들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무거운 죄책의 스트레스를 받게 함으로 오늘날 교회 사람들에게 성경에 순종시키려하고, 그들의 과오를 공적으로 인정하게 하여 용서를 구하게 하는 보기에도 안타까운 일들을 자행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상기한 책 27-37 페이지). N/C는 말하기를 마음의 껄끄러운 것은 고백하게 하는 정도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한다. 고백의 목적은 마음의 정화(catharsis)에 좋을 만큼만 하여야 하며 나쁜 느낌의 통풍(ventilation of bad feelings) 정도로 하여 그 나쁜 느낌을 제거하는 치료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한책 p33). 거듭 N/C는 말하기를 “죄책은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견해인 죄의 인식과 고백과 회개와 죄 사함의 운동이 “전적실패”(total failure)라고 하며 기독교의 전통 신앙을 자기들의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는 이러한 일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죄의 고백과 참회와 용서 그리고 죄 사함은 N/C에 있어서는 어처구니없는 넌센스이다. N/C 는 성경적인 내용은 빼고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성경적인 하나님의 상담을 가로 막고 있다. N/C는 또 신앙 양심에 채찍질 하는 죄책을 “심리학적 죄책”(psychological guilt)이라고 부르면서 심리학으로 일단 비껴 피한 후에 언어유희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학자들이 언어를 성경적으로 그럴듯하게 하고 있으면서 그 본질과 전개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아니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분별하여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하겠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가 ? 아니면 심리학자, 철학자들이 자기 사상을 전개 시키고 싶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가 ? 우리는 살펴야 한다.

내라모어는 프로이드 학파 (Freudianism)를 추종하며 프로이드 사상이 그의 성경해석에 영향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많은 핵심 성경구절들이 수정된 프로이드 사고에 적합하도록 재배열하고 있다.

때로 죄책은 신앙생활에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죄책이 항상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한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그렇다고 죄책이 나쁘다거나 효력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N/C는 주장하기를 죄책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훈련을 통하여 후천적으로 임한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담이 범죄한 후 죄책의 느낌 때문에 도망하여 몸을 덮고, 상대에게 허물을 전가하던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일이다.   

"동기 유발자로서의 죄의 느낌“(the sense of guilt as a motivator) 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으로 마음이 정해진 자들에게서는 아주 잘 효력을 나타낸다 (시편 51편 / 참고 삼하 12:10은 이 견해를 제시한다).

시 51: 1-2절: 죄책의 느낌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다윗의 내적 불행은 곧 하나님께 고백하게 된다.

3절 : 자기의 죄과를 알고 괴로워한다

4절 : 하나님이 다윗을 그저 용납하시지 않고 판단 정죄 하셨다 (N/C는 무조건 용납하라 하였고, 로져스 학파는 “무조건 긍정적 배려” (Unconditional Positive Regard)로 대하라 하나 성경은 준엄하게 회개를  촉구 하고 있다.

5-11절 : 계속적인 죄악의 고백과 참회와 애원하며 부르짖는 기도

12절 : 종을 연단하시고자 뼈를 꺾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원하는 헌신의 심령이 되게 하여 달라고 애원 청원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죄악은 사회화 교육에 따른 반응도 아니고 멸망의 근원이 된다. 겸손하게 하시사 성군 다윗으로 쓰시려는 주님은 그 주시는 고통이 N/C가 말하는 “건설적인 슬픔”(Constructive Sorrow)” 정도 이상이다 (p200) (이에 대하여는 곧 설명을 더 붙이려한다).

17절: 범죄한 자녀들이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주님은 원하신다 (욜 2:13). 반역과 교만, 자기 중심주의를 깨시기 위하여 고통과 불행을 야기 시키신다. 그러한 값을 치루어 내셔서라도 사람을 연단 하시기 때문이다. 깨어진 마음과 낮아진 겸손은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다. 곧 소생 시키셔서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이시다(사58:15; 시147:3).  N/C는 마음 상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나 하나님은 죄인의 마음을 상케 만드신다;  N/C는 어떤 죄책의 고통도 불필요 한 것 이라는 등 다윗과 정반대의 고집을 견지하고 있다(p200).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에 관하여 그저 웃으시면서 용납 하셨다는 사고가 그 어디에도 없다.     

N/C는 “신학적 죄책”(theological guilt)과 “심리학적 죄책”(psychological guilt)을 분리시킨다. 전자는 객관적 사실이고 후자는 주관적인 “느낌”중심이다 (상기한 책 p34). 진정한 신자는 자신의 죄책을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고 내적으로 그것으로 인하여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양심이 화인 맞아 둔하게 되지 않은 이상 (딤전 4:1-2) 객관성이 있는 죄책의 문제가 주관적인 통회를 이끌어 내지 않겠는가(시38:18) ?  안과 밖을 분리시키는 시도는 무엇인가 진리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신자는 이원론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중심과 삶이 하나 되는 거룩한 사람이다 - 그렇지 못할 때 신자는 주님 앞에 나아와 고백, 통회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N/C는 시 51편을 언급하기를 “다윗이 경험한 심리적인 죄책의 불행한 느낌은 하나님께로 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 한다 (상기한 책 p131). 이 말을 읽고 시 51:8과 시 38:2,3을 다시 읽어보면 무엇이 다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N/C는 고후 7:8-10을 중심으로 (위에서 한번 언급한) "건설적 슬픔" (Constructive Sorrow) 이라는 것을 도입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기정죄의 감각”(feelings of self-condemnation) 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을 살펴보자; 고후 7:10에 나온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lupe)은 철저한 회개를 하게 하여 다시는 후회 (repent / 문자적으로 하면) 하지 않을 역사를 이룬다는 말이다.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통회를 가져오지 않는 자기정죄의 느낌마저도 없다는 이론은 성령적이 아니다. ◉ 경건한 성도의 근심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하다가 현실과 부딛칠 때 가지게 되는 “하나님 초점”의 근심이요 ◉ 세상 사람의 근심은 자기 연민적(self-pity)인 “자기 초점”에 맞추는 근심이다. N/C는 도도하게 말하기를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에 심리적인 죄책을 느끼도록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상기한 책 p36). “심리적인 죄책”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말은 맞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고집적인 교만은 엇 비슷하다. 
 
약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 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의 기분감정이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도, 통회를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는 은혜도 세우시지 않으신다?  말이 되는 말인가 ?  N/C는 “나는 실패하였다”, 혹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라는 “느낌”마저도 잘못 되었다고 한다 (상기한 책 p34). 회개한다는 것, 후회하는 근심 모두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죄책감과 회개촉구 등이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데 방해가 된다는 N/C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구원을 주시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 죄악을 죄악이라고 하지 말라는 이와 같은 신 신학과 비 진리적인 심리학 접근의 망상들을 버려야 한다. 무슨 학문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원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고 안다고  는 그 이론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

죄책이 어떤 건설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고 N/C는 말하니 그러면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성도를 일깨워 경고하시는 말씀들은 어디로 보내어야 하는가?

“큰 환난”의 경고 (계 2:20-22); “일깨워야” 함의 경고 (계 3:2,3; 마24:42); “도적같이 임하시는” 주님을 대망하며 기름 준비 잘 하라는 말씀 (마25:1-13)은 어디로 보내야 하는가?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나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실패(failure)를 말하지 말고 “자신의 평가 절하”(lowered self-evaluation)를 말하지 말라고 하니 “저희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다” (계3:16-17) 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어찌하랴 !  N/C는 지옥도 천국의 기준도 없고 단지 심리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야 유익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절대적인 복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학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의 적(psychologists: not friends but our foe)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죄책과 죄에 대한 부담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이렇게 통회하고 죄를 미워하는 신앙에는 후회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 일어나게한다.   

그 외에도 호크마 (A.A. Hoekema) (그의 책 “기독인의 자기성찰” The Christian Looks at Himself,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5)에서도 바른 신학의 골격을 떠나 “성경을 사람의 심리에 맞추어 말하는 소위 심리화 작업”(psychologizes the Scriptures)을 하였다 (그 책 p35) (TCC p204).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과 격려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행 3:19) 과 정면 상충되는 그릇된 사상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책들을 양서라고 하여 베스트 쎌링 리스트에 올리곤 한다.

이 모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심리학자들이다. 위에 기술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죄책의 짐을 사람들에게 부려놓는 설교나 상담을 하지 말도록 경고하고”있다. N/C는 그의 책명과 같이 “죄책에서 신자들을 자유하게” (Guilt and Freedom / Freedom from Guilt) 하여 주어야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p205).

이들의 영향을 그대로 방치하여 두면 성경적인 목회, 성경으로 이끄는 교회, 성경으로 문제를 해결해야할 교회의 사명은 송두리째 심리학의 손아귀에 빼앗기고 만다. 누가 이 교회를 주셨는가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흘리신 속죄의 은혜가 아니며 아버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진리의 은혜가 아니던가 ? 앞서서 배운바 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 곧, 진노와 긍휼 / 심판과 은혜를 만족시키시는 완전하신 제사에서 기인된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의 생각과 심리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목회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이다. 개혁신학은 신본주의이다. 이에 이유가 있으면 “신 신학” 혹은 “자유신학” 혹은 “인본신학” 혹은 “심리신학”이라고 개명하여야 한다.

N/C를 정리하여 보자면;

1. “정확하고 좋은 자기의 모습”(accurate and good self-image)이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는 모습이어야지 N/C가 말하는 “죄책에서의 자유”(free from guilt)가 아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어도 완전 성화를 이룬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생활에서 죄를 무시하거나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엡4, 골3장은 증거하기를 그리스도안에서 무엇인가를 가졌으므로, 신자는 그 자신에게서도 주님의 베푸신 것을 가질 줄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되어진 그 모습이 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에 이루어지게 하라”는 것이다 (p205).

2. “우리가 너무 귀하여서(because we are so valuable...) 주님이 모든 최고의 값을 지불하시었다”(상기한 책 p49)고 하는 그들의 말은 인간을 높이는 말이다. 인간은 약하고, 죄에 오염되었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인데 불쌍하여서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의 은혜가 모독됨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로 구원하신 것이다.   

3. N/C는 모든 선한 것이 모두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이 너무 귀하여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사람은 하나도 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도 성화와 헌신의 도리에서 어긋난다. 챨스 솔로몬(Charles Solomon)은 “우리가 우리를 포기하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선한 모든 일을 다 행하신다; 우리가 포기할 수 있는 대로 포기하면 할수록 그분은 더욱 많이 행하신다”고 하며, “자기도움 (Self-help)”주의는 “우리자신의 힘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고하며, N/C는 “하나님은 선을 좀 행하신다. 우리도 선한 일을 좀 행한다. 누구도 선한일을 모두 다 행하는 자는 없다”라고 풀이한다. 성경(Biblical view)은 무어라고 하는가 ? “모든 우리가 하는 선한 일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하여 하는 것이다” (p206) 라는 주님의 언급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골 1: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4.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N/C는 말 한다 (상기한 책 p63) (TCC p207).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으로 타고나는 부패이다 (자기중심).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가만히 두어도 너희는 네 몸을 사랑하는데 이웃을 그와 같이 사랑하라 하셨지 죄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 자신을 회개하지도 않고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 아니다 (마22:39 참고).

5. N/C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결코 처벌하시지 않으신다고 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처벌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기억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가 맴매”하는 관념 속에 산다는 것은 겁을 주어 아이들을 닦달하는 수단임으로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다(상기한 책 p69).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 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도덕률 폐기론 주의”(antinomianism) 이단 론이다.  저들의 해석에 의하면 “처벌”(punishment)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값”인데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지불하신 것을 가지고 왜 마음에 죄책을 느끼느냐고한다 (상기한 책 p70) (“구원파”사람들도 이와 같이 말한다). 성화 되어 가는 동안 자범죄는 주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교정하시기 위하여 회개하고 바로 될 때까지 징계하시고, 처벌하시고, 연단하시고, 책망 하신다 -  성경에서의 처벌(punishment)은 불신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악행에 대한 처벌”에만 제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것은 잘못된 정의이다. 고후 2:6참고 (교회 징계로서의 처벌). 여기에서의 “에피티미아 (처벌 epitimia)”는 “권리의 제한”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7,10절에서 잘못의 용서는 회개가 있은 후에 나타난다. 고통, 상실, 제한 등에 의한 처벌은 모두 잘못을 시정하기 위한 처벌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교정을 위하신 매를 드심에 대하여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 속성을 갖는다. 우리의 기분과 느낌이 좋지 않더라고 주님은 이를 행하신다 (히12:5-11). 징계는 고통스럽고 기쁘지 않다 (히12:11). 이는 N/C의 견해와 상충한다. 처벌은 진정한 회개를 불러오시는 주님의 사랑의 매 이다. 진정한 회개와 죄 사함 받는 동기는 죄책감에서 나타난다.

6. 신자가 죄를 범할 때 나타나는 일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 한다;

  a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b.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만드시기 위하여 회개를 요청하신다면 이것은 자신의 “정신적인 훈련(own mental gymnastics)”의 문제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c.하나님은 어떤 장벽도 설치하지 않으신다.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d.하나님은 전적으로 용납 하신다;
  e.죄악은 “원래 모습의 결과들 (built-in consequences)”일 뿐이다;
  f.“허위 죄책(false guilt)”도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악이라 간주하시지 않는 것까지도 수 많은 경우에 죄책을 갖는다”;
  g.“죄책의 느낌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다 (guilt feelings are not the voice of God at all)”. 죄책의 느낌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다 (상기한 책 p123); 
  h. 죄책감은 죄악들이 나타난 것을 의미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것일 뿐이다 (상기한 책 p124);
  I.죄책을 위 하여는 고백을 하여야 한다. 고백은 정화이다 (confession is catharsis) (상기한 책 pp131,132) (TCC p210). 죄책을 처리하는 일은 우리의 곤란에서 벗어나는 문제이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상기한 책 p134).

[N.B.] 저자가 N/C에 대하여 지면을 많이 할애한 이유는 이와 같은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교계에 많이 나타나 어지럽게 할 것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p210).

VI. 죄책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 (Biblical Teaching)

용서받고 또 용서받고 처벌받고 또 처벌받고 ...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 그러면 단번에 완전하신 구속을 이루셨다는 예수님의 죄 용서하심의 용서에 한계가 있는 것인가 ? 어찌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약한 신자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시는 것인가 ? 이러한 질문들을 수렴하여 대답을 주려는 N/C의 시도에는 찬사를 보낸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을 이끌어 내는 것은 목회와 상담과 신학에서 “용서”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답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남으로 위에서 지적을 하여 둔 것이다.

우리는 줄곧 “전통/전승적인 견해”(traditional view)를 견지하여 왔다. 이에 대한 반증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이하 WCF로 표기함) 제11장 “칭의”장 제5조에 잘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의롭게 된 사람들의 죄를 계속 사하신다(마6:12; 요일 1:7-9; 2:1,2). 그러나 그들이 칭의의 상태에서 결단코 실족되는 일은 없다고 할지라도(눅 22:32; 요 10:28; 히 10:14),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부성적 (父性的) 불쾌감을 가져 올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겸손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며 사함을 구하고 자신들의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할 때에야 비로소 저들에게 하나님의 얼굴빛이 회복을 하시게 된다 (시 89:31-33; 51:7-12, 32:5; 마 26:75; 고전 11:30,32; 눅 1:20).

일반적으로 말하여 N/C는 위와 같은 진리에 정면으로 도전 하였다. 그런데 죄 용서함을 받고 다시 용서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좀 더 해 보아야 하겠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바리새인들 보다 나은 의로운 삶을 살도록 지시하시고 계신다 (마 6:12f 14,15) ;

“아버지”라는 말씀이 4, 6, 8, 9절에서 등장하고 14,15절에서는 그 용서함 받는 것이 “아버지”깨로서 온다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 소관이다. 용서받은 신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신다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곧, 용서받은 후에 다시 용서받는 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용서의 도리는 곧 우리의 삶에 늘 일어나는 죄악이 있다는 것과 이 죄악을 씻어 내야 한다는 중요한 전제를 담고 있다. 또  ◉ “사법적인 용서”(judicial forgiveness)는 구원의 문에 들어갈 때 해결되었고 또 성문에 이를 때에 들어가게 하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백보좌에서 심판하는 심판에서 지옥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법적인 용서는 그렇고 여기서는  ◉ “부모적인 용서”(parental forgiveness)”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p212). 

WCF에서 “하나님은 의롭게 된 사람들의 죄를 계속 사하신다” 는 말은 자녀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하여도 자기의 자녀인 것 같이 그 신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인 문제) 죄를 짓는 자녀가 부모에게 나아와서 회개할 때 얼마든지 용서하는 부모-자식간의 용서와 해결을 말하는 부분인 것이다. 어떤 부모이건 자기 자녀를 법정에 선 범죄인을 다루듯이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이 하듯 부모들도 재판장과 유사한 심정으로 책망하고 책벌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에서 우리는 사법적인 용서와 부모 적인 용서의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이 둘 에서 다음 여덟 가지의 주제들로 조금씩 살펴 보기로 하자;

A. 죄책 (Guilt) : 죄의 책임은 죄 사함이 해결한다. 해결 받았어도 남은 자범죄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서는 늘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나 부모에게나 이것은 유사하다.

B. 처벌 (Punishment) : 영원한 처벌과 잠시 동안의 처벌은 차이가 있다. 고치고 바로 세우시려고 징계하시고 처벌하신다. 부모가 남의 자녀를 징계하는 법은 없다.

C. 하나님 (GOD) : 의와 불의, 성도와 사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며 부모와 같으신 분이시다.

D. 책망 (Rebuke) : 한편에는 정죄가 있고 한편에는 교정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녀를 변화시키기 위한 교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의 문제가 아닌 심판의 정죄가 있다. 변화를 위한 책망을 잘 들어야 정죄에 이르지 아니한다. 

E. 죄책의 느낌 (Sense of Guilt) : 한 책망에서는 히 2장과 고전 15장에 언급된 두려움이 있고, 다른 책망에서는 우리가 천부께 불순종하고 그에게 욕을 돌린 것에 대한 뉘우침이 있다; 

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고전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자신의 기분감정으로 출발되는 죄책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호와 하나님의 교회에 돌려질 귀결에 관심을 쏟는다. 죄책감은 많을수록 좋다.

F. 고백 (Confession) : 자녀가 아버지에게 굴복하는 의미의 고백과 양심으로 나오는 죄책감으로 부담을 가지고 회개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G. 용서 (Forgiveness) :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책이 제거된다. 한편에서 영원한 처벌을 받을 책임이 제거되는 것이라면 한편으로는 부모로서의 “불쾌감”이 끊어지는 것이다.

H. 관계 (Relationship) : 사법상 죄 사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립 된다면 거듭되는 용서로서 부모자식관계가 수립된다.

사법상과 부모적 용서 속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우리는 알았다. 이를 통하여 전체적인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 은혜의 진리는 보존되고 율법적인 사고는 피하고 무분별한 삶을 지양함으로 “용서”에 대한 한결 바른 사고를 가지고 목회와 그 가르침, 그리고 상담사역에 도움을 가져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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